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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수] 퇴근길 댄스 모임에서 아내를 만나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민병수 변호사
<6> 교사, 결혼, 변호사 합격까지

민병수 변호사가 변호사 선서식을 마친후 자격증을 들고 아내 캐롤 민, 아들 크리스토퍼 민과 함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 빌딩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제공=민병수 변호사

민병수 변호사가 변호사 선서식을 마친후 자격증을 들고 아내 캐롤 민, 아들 크리스토퍼 민과 함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 빌딩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제공=민병수 변호사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소”
“그럼 결혼하면 되잖아요”
1970년 3월 21일 윌셔 감리교회에서 열린 결혼식 사진.

1970년 3월 21일 윌셔 감리교회에서 열린 결혼식 사진.

낮엔 교사, 밤엔 로스쿨 학생
남가주 두번째 한인 변호사로


1960년 5월.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가을부터 공립학교의 풀타임 교사가 됐다. 첫 부임지는 웨스트 코비나에 있는 샌호세 초등학교. 웨스트 코비나는 1950년대 오렌지밭이었지만 이후 개발붐이 일면서 주택단지가 들어섰고 유입되는 인구도 급증하면서 학교도 여기저기 생겼다.

샌호세 초등학교는 교사 자격증을 받기 전 교생 실습을 하던 학교였는데, 민 변호사를 잘 봤는지 교장의 추천으로 정식 교사가 됐다.

민 변호사는 그곳에서 5년 동안 5~6학년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당시 교사들의 초기 연봉은 월 400달러 정도였다. 경력과 자기계발에 필요한 수업을 들은 점수 등을 토대로 월급이 매년 인상됐는데 결혼할 때쯤에는 월 1700~1800달러까지 벌어 빠듯하지만 혼자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민 변호사는 1965년 형(병화)이 있는 일리노이주 시카고로 이주한다. 의대 졸업 후 인턴십과 레지던시를 마치고 의사가 된 형은 혼자 지내려니 외롭다면서 동생을 부른 것이다. 민 변호사도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던 형과 살기 위해 시카고로 옮겨 그곳 해몬드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LA에서 자리를 잡고 생활했던 민 변호사는 친구도 없고 외로운 시카고 생활이 힘들었다. 게다가 시카고 교사 월급은 LA보다도 적었다. 결국 1년 만에 다시 짐을 쌌다.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민 변호사는 변호사 시험 합격 통지서를 받는 1975년 5월까지 코르테즈 초등학교에서 6년, 윌로우중학교에서 1년을 더 가르쳤다.

연애 시절의 엇갈린 기억

1968년 8월. 민 변호사는 LA에 있는 YMCA에서 열린 댄스 믹서(Mixer·모르는 사람들이 만나 음료수를 먹으며 친분을 쌓는 간단한 파티)에서 지금의 아내(캐롤 민)를 만난다.

당시 25살이던 민씨는 오리건주 동부 에코 출신이다. 한인은 커녕, 아메리칸 인디언과 카우보이가 있던 시골이다. 가주에 있는 대학(캘폴리 포모나)에 진학하기 위해 LA로 온 민씨는 당시 YMCA가 운영하는 한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렌트비가 저렴해 젊은 미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던 곳이다. 민씨는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가 윌리엄(민 변호사의 영어 이름)을 처음 만났다. 정장에 하얀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그게 굉장히 웃겼다”고 첫인상을 회고했다.

민 변호사는 몬터레이 파크 인근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코르테즈 초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그날따라 복도를 지나가는데 학교 게시판에 댄스 믹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걸 보고 퇴근하는 길에 갔다.” 민 변호사의 회고다.

알고 보니 민 변호사는 춤을 즐겼다. 파티에서 두 사람은 파트너가 됐고 민 변호사는 그 때 아내에게 “일본을 가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제안했다. 그 뒤 만남에 대한 기억은 여느 커플처럼 재미있게 엇갈린다.

민 변호사의 경우 “단순히 관심이 있어서 물어봤는데 갑자기 캐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알고보니 여행사를 알아보기 위해 전화번호 책자를 찾으러 간 거였다”며 ‘믿거나 말거나’ 식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웃으며 옆에서 듣던 민씨는 “일본에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본 건 맞지만 전화하겠다는 말만하고 헤어졌다”고 정정을 했다. 민씨는 “나중에 우리가 결혼하자 로컬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때 윌리엄은 내가 일본에 같이 갔다고 말했다. 나는 속상해서 수정해야한다고 했는데, 윌리엄은 오히려 눈길을 끄니 그냥 놔두라며 재미있어했다”고 했다.

전화 통화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게다가 서로가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진 게 아니었기에, 전화가 올지 긴가민가했다. 무엇보다 그때는 복도 로비 중앙에 설치된 전화기 한 대로 모든 사람이 통화하던 때였다.

민씨는 “파티에서 헤어질 때 번호를 물어보길래 전화번호 책자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진짜 전화를 할까 굉장히 기다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달 뒤쯤 민 변호사는 민씨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때부터 둘의 데이트는 시작됐다.

도박하는 심정으로 변호사 도전

그 때쯤 민 변호사는 법대 입학을 준비했다. 어릴 때부터의 꿈인 변호사가 되는 길에 도전해보기로 한 것이다. 노스웨스턴 로스쿨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려니,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만나던 데이트 시간을 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민 변호사는 민씨에게 당분간 만날 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낮에는 일 때문에, 밤에는 대학원 수업 때문에 힘들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럼 결혼을 하면 어떻겠냐고 먼저 말했다”는 민씨는 발그레해진 뺨을 손으로 누르며 “그 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 주부터 둘은 결혼반지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민 변호사의 부모는 단번에 승낙했다. 이미 민 변호사의 형과 여동생도 백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었기에 쉽게 이해하셨다. 반면 신부 측 부모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민씨는 “나와 달리 2차대전 참전군인이었고 보수적이었던 양아버지는 결혼 얘기를 듣자마자 반대했다”며 “나중에 윌리엄을 만나더니 맘에 들어하셨고 그때부터는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결혼 후에는 주말에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글렌데일의 로스쿨로 옮겼다. 큰 아들이 태어난 후부터는 매일 밤 샌드위치 하나를 싸들고 USC 도서관을 찾아갔다.

“변호사 시험공부는 말 그대로 도박하는 심정이었다. 변호사가 되더라도 동양인에게 누가 사건을 의뢰하겠나 싶었다. 그래도 매일 도서관과 집을 오가는 길에 기도했다. 시험에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1975년 5월. 두 번의 도전 끝에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었다. 가주에서는 세 번째, 남가주에서는 두 번째로 탄생한 한인 변호사였다. 다음 달 학교에 사표를 제출하고 은퇴연금을 일시금으로 받았다.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는데 쓸 종잣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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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인 사회는

1960~70년대에 아시안은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했다. 연방센서스국 통계에 따르면 1960년 가주의 경우 아시안(31만 8376명)은 주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했다. 반면 백인(1445만 5230명)은 92%로 압도적이었다. 70년대에 들어와 아시안(55만 2364명) 인구는 전체의 2.8%로 조금 늘었지만 여전히 백인(1776만 1032명)이 주를 이뤘다. 이때 한인 인구는 6만913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변화는 있었다. 1967년 6월12일 연방 대법원은 백인과 타인종 간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을 폐지했다. 1912년 12월 시본 로든베리 의원이 제안한 헌법 수정안이 통과된 지 55년 만이었다.

민병수 변호사는 “결혼할 때쯤 다행히 타인종과의 결혼이 합법이 됐다. 아이러니한건 나는 이걸 인식하고 있었지만 아내는 그런 법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타인종 간의 결혼은 계속 증가 추세다. 70년대 31만건으로, 전체 기혼 커플의 0.7%를 차지했지만 2008년도엔 3.9%에 이른다.

또 다른 변화는 1965년 국가별 할당제를 없애는 이민법(INA)이 통과되면서 한인 이민자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1970년대 전반까지 간호사, 의사, 약사 등 전문기술 자격증을 갖고 있는 이민자들이 중심을 이루다 후반부터는 가족 초청에 의한 이민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LA한인타운은 1960년대부터 한인들이 쇠락해 가는 지역의 상가와 사무실 건물을 저렴하게 구입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1968년 이민 온 고 이희덕씨가 ‘코리안 빌리지(Korean Village)’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영빈관(당시 3014 w Olympic Blvd)’을 개업해 커뮤니티 장소로 제공하는 등 노력하면서 올림픽 대로와 크렌쇼 대로 중심으로 한인 상점이 줄을 이어 들어섰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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