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Los Angeles

54.0°

2020.11.28(Sat)

[이건희 회장 별세]충격의 애니콜 화형식…불량률 12→2%

  • 글꼴 확대하기
  • 글꼴 축소하기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10/24 18:10

이건희 회장, 2004년 화성 반도체사업장 전략회의에서
선친 반대 무릅쓰고 반도체에 뛰어든 이유 설명하면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아테네 삼성홍보관을 방문해 전시된 휴대폰을 둘러보고있다. 오른쪽은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아테네=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내수 소비재 업체에서 세계적인 IT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반도체-모바일-가전’이 삼각축이다. 특히 삼성전자의 삼각축으로 구성된 사업 포트폴리오는 전 세계 어떤 IT기업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1950~60년대 한국은 ‘삼백(三白)’(백설탕ㆍ밀가루ㆍ면방직)이 산업의 주축이었다. 삼성 역시 설탕과 밀가루(제일제당), 면방직(제일모직)이 주력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자동차ㆍ조선ㆍ건설 등 중후장대 산업이 ‘3저 호황’(저달러ㆍ저유가ㆍ저금리)을 맞아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오르자 삼성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좁아졌다. 이 회장의 회장 취임 당시 재계 순위도 현대에 밀린 2위였던 이유다.



2010년 5월17일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이 기공 기념 시삽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권오현 사장, 이 회장, 최지성 사장, 이재용 부사장, 윤주화 사장(당시 직책). [사진 삼성]






“천연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와 기업이 앞으로 살아남을 길은 머리를 쓰는 하이테크 산업밖에 없다고 생각해 과감히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이 회장이 2004년 화성 반도체사업장에서 열린 반도체 전략회의에서 밝힌 말이다. 선친인 호암 이병철 회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에 뛰어든 이유를 설명하면서다. 이 회장의 반도체 투자 결정은 동양방송(TBC) 이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74년 12월 6일 호암과 비서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재를 출연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3년 뒤 나머지 지분 50%도 인수했고, 이듬해인 78년 3월 2일 사명을 ‘삼성반도체’로 바꿨다.

83년 2월 “삼성도 미국ㆍ일본처럼 초고밀도집적회로(VLSI)에 투자하겠다”며 이른바 ‘도쿄 선언’을 한 건 이병철 창업주였지만, 실제 D램 메모리반도체는 이 회장이 직접 지휘했다. 삼성반도체는 그해 12월 ‘64K D램’은 출시하며 세계 반도체 시장에 데뷔한다. 당시만 해도 미국ㆍ일본만 양산하던 제품이다. 1993년엔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에 앞서 이 회장은 경기도 기흥에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8인치 웨이퍼 기반의 D램 양산라인을 착공했다. 8인치는 당시 주류던 6인치보다 생산성이 1.8배 높았지만, 공정이 복잡하고 깨지기 쉬워 수율 확보가 어려웠다. 미국과 일본 업체들도 뛰어들지 못하던 상황에서 이 회장은 과감히 8인치 웨이퍼를 채택한 것이다. 이 투자로 삼성은 월 2만장의 8인치 웨이퍼로 16메가 D램을 300만개 양산 라인을 세웠고, 94년(1조6800억원)부터 국내 기업중 처음으로 '조 단위'의 영업이익을 내게 된다. 삼성은 이후 '초격차 전략'을 내세워 반도체 시장을 선도했다. D램 부문 28년 연속, 낸드플래시 부문 2002년부터 17년 연속, PC 하드디스크의 부피를 획기적으로 줄인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는 2006년부터 13년 연속 각각 1위다.




1995년 삼성전자 임직원들이 삼성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애니콜을 비롯한 전화기, 팩시밀리 등 불량제품 15만대를 전량 폐기 처분하는 모습. 당시 삼성전자는 150억원에 달하는 제품을 폐기하는 '불량제품 화형식'이란 초강수를 쓰면서 삼성 전반에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사진 삼성전자]





TV 역시 이 회장의 안목이 빛을 발한 사업이다. 일본 체류 시절부터 영화를 즐겨봤고, 자신의 첫 직장이 TBC였기 때문에 그만큼 TV화질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 회장은 TV시장이 브라운관에서 평면으로 바뀔 것을 직감하고 삼성전관을 통해 대형 액정패널(LCD) 투자를 단행했다. 또 화질을 좌우하는 칩 개발에 반도체 기술자 약 500명을 투입했다. 삼성전자의 디자인팀은 이탈리아 밀라노 등으로 보냈다. 그 결과 삼성은 2006년 ‘보르도 TV’를 시작으로 소니가 차지했던 세계 TV 1위 고지를 밟았다. 당시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학생이 선생을 뛰어넘었다"고 보도했다. 삼성은 지난해까지 13년 연속 세계 TV시장 1위다.

삼성은 90년대 초반 휴대폰 사업에 진출한다. 산악지형이 많은 국내에서 잘 터진다는 의미로 '애니콜' 브랜드를 내세웠지만, 당시 글로벌 선두업체인 모토로라나 노키아 제품과 비교하면 통화 품질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이 회장은 95년 3월 구미 사업장에서 ‘애니콜 화형식’이란 충격요법을 동원한다. ‘품질은 나의 인격이오 자존심!’이란 현수막을 내걸고 임직원 2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량 휴대전화와 팩시밀리 등 15만 대를 불태웠다. 애니콜 화형식을 계기로 11.8%에 달했던 삼성 휴대폰의 불량률은 2%대까지 떨어졌다. 2002년에는 화면을 넓히고 조약돌 느낌을 주는 소위 ‘이건희폰(SGH-T100)’, ‘블루블랙폰’(D500)으로 ‘텐 밀리언 폰'(1000만대 판매) 시대를 열었다.



1994년 8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 256메가 D램 개발 성공을 전하며 일간지에 낸 광고. [중앙포토]






삼성 휴대폰 사업은 2007년 애플 아이폰의 등장 이후 당시 세계 1, 2위였던 노키아, 모토로라와 함께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노키아나 모토로라와 달리 삼성은 발 빠르게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받아들여 스마트폰 ‘갤럭시S’와 ‘갤럭시 노트’를 출시했다. 2011년부터 삼성은 스마트폰 판매 대수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오늘의 핫이슈

PlusNews

포토 뉴스

전문가 칼럼전문가 전체보기

한청수 한의사

한청수 한의사

HelloKT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