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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홍](1) 인민군 포로로 끌려가다 탈출

[LA중앙일보] 발행 2020/11/24 미주판 1면 입력 2020/11/23 19:15 수정 2020/11/24 14:53

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한인은행의 '처음' 벤자민 홍(1932~ )
〈1〉참전에서 미국 유학까지

<사진=김상진 기자〉

<사진=김상진 기자〉

6·25 때 통역장교로 복무
꿈 좇아 1970년 미국으로


벤자민 홍 행장(88)은 혁신의 아이콘이다. 항상 ‘최초’와 ‘처음’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남다른 추진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한인 은행업계에 역사를 썼다. 그는 한미·나라·새한은행 등 세 곳에서 19여년 동안 행장을 맡았다. 한인은행들의 중요 수입원 중 하나가 된 SBA 융자도 한인사회에 처음 소개했다. 최초의 나스닥 상장 한인은행을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던 여성 지점장도 과감하게 임용했다. 그가 발탁한 여성 행원들은 이후 한인은행을 이끌어가는 주역이 됐다. 중앙일보 창간 46주년 기획 시리즈 '남기고 싶은 이야기' 두 번째로 벤자민 홍 전 행장의 발자취를 들어본다. LA 한인사회 초창기 한인 은행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함이다.

시야에 들어 온 건 우거진 나뭇가지들뿐이다.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울뚝불뚝 솟아오른 돌멩이의 감촉으로 거친 산길을 걷고 있음이 느껴졌다. 북한 인민군에 잡혀 포로가 된 홍병각(벤자민 홍) 중위는 태백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통역 장교로서 그가 처음 배속됐던 강원도 인제의 9사단은 석 달 전 인민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됐다. 퇴로가 막혀 물러서지도 못한 군인들은 쏟아지는 총탄에 스러져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살아남은 몇몇은 포로가 됐다. 그중 홍 중위와 다른 2명은 한 특무상사 덕에 탈출할 수 있었다. 3일간 먹지도 못하고 겨우겨우 강원도에 있던 미 2사단을 찾아서 살았다. 성이 민씨였던 그 특무상사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다고 홍 행장은 회상한다.

참혹하게 젊은 생명이 사그라지는 모습은 당시 19세였던 그에게 잊지 못할 충격이 되어 평생 남았다. “총알 하나에 사람의 목숨이 쉽게 지는 걸 내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던 아군의 얼굴이 갑자기 피범벅이 되는 모습은 어린 나이에도 인생의 허무함을 알게 해줄 정도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는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바뀌었습니다.”

홍 행장은 지그시 눈을 감고 당시를 떠올렸다. 가치관, 신념, 인생 철학은 그때를 기점으로 크게 바뀌었다.

FIB 대만 지점 개설 축하 자리에서 벤자민 홍 아시아태평양 지역 수석 부사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내빈을 맞고 있다.

FIB 대만 지점 개설 축하 자리에서 벤자민 홍 아시아태평양 지역 수석 부사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내빈을 맞고 있다.

“둘러보니 나 빼고 모든 임원이 백인이었다”

UCLA 졸업, FIB서 고속 승진하며 주류사회 활동
한미은행장 제의에 1년 숙고뒤 한인사회로 들어와


벤자민 홍 행장은 아버지가 건축업을 하는 중산층 수준의 가정에서 1932년에 태어났다. 그는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까지 일본인 교사로부터 일본어로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한글을 ㄱ, ㄴ, ㄷ부터 배웠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조용했던 학생 홍병각은 고등학교 3학년 때 6·25전쟁을 맞게 됐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우리나라를 해방한 미국에 대한 관심이 커져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영어 선생님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웠다. 군대는 ‘유엔군 연락 장교단 모집’ 공고문을 보고 지원했다. 미군 상대 통역 장교로 나라에도 봉사하고 본인의 영어 실력도 가늠해보고자 한 게 지원 동기였다.

그가 처음 배속된 곳은 3군단 예하 9사단이었다. 한국전 3대 패전으로 기록된 현리전투가 벌어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현리가 9사단의 주둔지다. 기록에 의하면 중공군 12군단, 27군단, 조선인민군 5군단이 국군 3군단을 공격한 전투다. 국군 3군단의 지휘통제는 포위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당시 사단장과 지휘관들은 계급장을 떼어내고 살기 위해 달아났다.

지휘통제가 와해한 9사단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9사단 병력의 60%가 사망했거나 실종됐다. 9사단 소속의 홍 중위는 포로로 잡혀 북송되던 중에 민 상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던 것이다. 대구로 후송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장으로 재직하던 육군 정보학교에서 번역 일을 맡았다. 번역 장교가 교장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던 터라 그의 기억 속에 남은 박 전 대통령은 냉철하고 과묵하며 대범했지만 본인한테는 엄격했다.

특무대대로 자리를 옮긴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김창룡 특무대장과 인연을 맺었다. 이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미국인 윌리엄 글렌 박사도 만났다. 글렌 박사는 1953년부터 4·19 때까지 7년간 이 전 대통령의 대외문서 작성을 도왔고, 그 후 자유 중국에 건너가 대만 정부의 신문국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는 홍 행장이 미국 행을 결심하게 한 인물이다.

홍 행장은 1956년 육군 대위로 예편한 뒤 1960년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했다. 그후 10년 동안 삼영목재에서 일하면서 전무 이사 자리까지 올랐다. 그 와중에 군사 혁명 정부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마다하고 1970년 LA 땅을 밟았다.

벤자민 홍이 되다

LA에 와 고등학교 동창의 권유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주유소를 할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정착하려면 미국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마음에 UCLA 앤더슨 경영대학 석사과정 입학을 결심했다. 39세의 나이 때문에 입학허가가 잘 나오지 않자 그는 글렌 박사에게 추천서를 부탁했다. “남들이 공부할 때 그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는 내용이 담긴 글렌 박사의 추천서 앞에 UCLA의 문이 열렸다.

그는 UCLA 웨스트우드에 아파트를 빌려서 캠퍼스 생활을 시작했다. 1년 동안 원 없이 공부만 했다. “일제 강점기, 광복, 한국전쟁으로 제대로 공부한 기억이 없었습니다. 영어와 문화 차이의 벽은 높고 한국과 다른 토론식 수업 때문에 3~4시간밖에 못 잤지만 1년간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는 그때 받은 교육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당시 한국에서 가져온 자금의 대부분을 석사학위 취득에 투자한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교육은 초기엔 돈이 많이 들지만 나중에 가져다 주는 이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나만 봐도 교육에 투자한 비용 대비로 평생 수백 배의 이득을 얻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교육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걸 증명하듯 경영학 석사(MBA) 과정이 끝나갈 무렵 당시 금융계 톱10이었던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퍼스트인터스테이트뱅크(FIB) 2곳에서 동시에 일자리 오퍼를 받았다.

기업들과 연결고리인 은행을 알면 미국 경제와 사회를 빠르게 이해할 수 있어서 정착에 용이할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 아래 은행에 들어갔다. 물론 급여도 좋았다.

당돌한 사회 초년생

각 은행의 인사 담당자들과 인터뷰를 마친 그는 은행 내 아시아인으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른 인물과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 아시안 임원도 없었던 당시를 생각하면 매우 당돌하고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아시아계로서 승진 가능한 직위와 그들의 근무환경 등 조직문화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BoA에서는 중국계 부행장(VP)을, FIB에서는 동경 지점에서 출장 온 일본계 부행장을 만났다. BoA 관계자는 최고 은행에 다니려면 인종차별은 감수하라고 일렀다. FIB 관계자는 "이 기업은 크지는 않지만, 인종에 대해서는 색맹(color blind)"이라고 말했다. 홍 행장은 색맹의 뜻을 되물었다. 인종 차별에 둔감하다는 속뜻을 들은 홍 행장은 지인과 동창들의 예상을 깨고 FIB에 입사해 국제부 론오피서 일을 시작했다. 1972년이었다.

흰 벽에 붙은 파리

FIB에서 주요업무는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 은행 및 기업들에 달러 여신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일본어와 한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입사 5년 만에 아시아태평양 지역 수석 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임원 회의에 참석한 그는 친했던 직장 동료에게 ‘너는 흰 벽에 붙은 파리 한 마리 같다’는 농담을 들었다. 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홍 행장을 제외한 임원이 모두 백인이었다.

"인종에 둔감했던 은행을 고르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일본어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아시아계 임원으로 발탁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기회는 주어진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만들어가는 게 더 맞습니다. 사회생활을 할 때 본인 스스로 생각하고 실행하는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면 성공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홍 행장은 은행의 자회사인 트레이딩 컴퍼니 대표를 거쳐 1984년 대형 방위산업체인 노스롭의 금융담당 부장으로 옮겼다. 연봉도 두둑했고 전 세계를 다니는 구상무역 업무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년쯤 되었을 때 한미은행 이사들로부터 행장 제의를 받았다. 이 제의를 수락하는 데 1년여를 숙고했다. 한미은행은 삼고초려 끝에 홍 행장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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