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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명함집

낮은 책꽂이 위에 얹어둔 미니 탁상시계가 방금 정각을 알렸다. ‘댕댕댕’ 하고 종 치는 소리로 알리는 것이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차임으로 노래한다. 내가 일하는 공간에서 몇십 년을 나와 함께해 온 시계이다. 은퇴 전에는 나의 오피스에서, 은퇴 후에는 서재에서 노래한다.

까만색 나무 테두리가 내 손바닥보다도 작은 시계를 완벽하게 둘러싸고 있다. 시간은 로마 숫자로 표시되어 있다. 나의 환자가 만들어 준, 세상에 몇 개밖에 없을지 모르는 시계이다. 이 시계는 앞으로도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내가 젊었을 때는 대부분 환자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성인 환자들, 나보다 연장자 환자들은 발병한 암 치료를 위한 상담을 받으러 왔다기 보다 암과 상관없는 다른 사연 보따리를 갖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슬픈 이야기, 가끔은 기쁜 인생 이야기들이 담긴 보따리였다.

어느 날 갑상선 종양에 걸린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청년 환자가 수술을 받은 후, 의뢰되어 왔다. 나이 탓이었는지 그는 수줍은 편이었고 묻는 말에만 답했다. 갑상선 종양은 중년 또는 노년층 그리고 여성이 많이 걸린다. 그의 수술 부위와 갑상선과 관련된 림프샘이 지나가는 쪽을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턱 아래 ‘아담의 사과’라고 불리는 부분이 있는 목의 중간부터, 가슴 중앙 부분의 상위를, 그것도 신체의 앞면 쪽에 치중해서 방사선이 쪼이도록 계획을 세웠다.



목 부위의 피부가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되고, 식도도 방사선을 쪼인 부위로 음식이 지나갈 때 무척 아프게 된다는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는 치료를 잘 받고 부작용도 잘 견디었다. 치료 마지막 날 자기가 만든 것이라며, 조그만 선물상자를 부끄러워하면서 건네주고는 쏜살같이 클리닉을 떠났다. 내가 받은 선물 중에 무척 뜻깊은 촌지였다.

미국인 환자들은 주치의에게 촌지를 건네는 정서가 없다. 특히 본토박이 백인들은 더더욱 그렇다. 갓 이민 온 백인들은 조금 달라서 고맙다는 뜻으로 선물을 주는 경우가 꽤 있는데 그 점이 흥미롭다. 내가 한국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많이 비교되는 점이다. 일반 병동과 특실은 선물의 종류에 차이가 있었지만, 퇴원할 때 여자 인턴에게 부담되지 않는 스타킹 하나를 건네는 다정함이 있었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되어서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의 모국은 ‘김영란법’이 생겨야 할 정도의 사회다 보니, 병원의 분위기도 일반 사회와 다를 바 없을 것으로 상상해 본다. ‘선물’이 너무 커서 ‘뇌물’과 구분이 어렵게 된 시대인가 보다.

45년 미국 의사생활 동안 받은 귀한 선물 몇 개를 들라면 직접 나의 이름을 새겨 만든 이 세상에는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명함집과 바이올리니스트 유대인 할아버지가 바흐의 샤콘을 직접 연주, 녹음해서 준 잃어버린 테이프가 있다. 그들의 나를 향한 마음이 담긴 귀한 선물이었다.

촌지(寸志)라는 말을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다. 마디라는 뜻의 촌(寸)과 뜻이라는 의미의 지(志)가 합쳐져서 된 한자인데, 일본식의 한문이라고 한다. 한자를 들여다보면 손가락 한 마디처럼 작은 뜻이 담긴 마음이라는 의미다. 주는 사람의 겸손함이, 작은 선물에 담긴 고마움이 그대로 배어 있는 말 같다. 국립국어원은 촌지라는 단어 대신에 ‘작은 뜻’으로 순화해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세월이 너무 흘렀기에 암이 완치된 명함집을 만든 여인, 샤콘느를 연주했던 유대인 노인 모두 이 세상에는 없다. 웨스트민스터 차임이 울리고 있듯이 갑상선암을 앓았던 그 청년은 오늘도 새로운 형태의 시계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류모니카/종양방사선학 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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