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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정](1) "절반이 전사한 전우 수첩, 내 버팀목이었다"

박용필 객원기자
박용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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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발행 2021/01/12 미주판 6면 입력 2021/01/11 19:00 수정 2021/01/11 18:09

남기고 싶은 이야기<제3화> 국군포로에서 아메리칸 드림까지 토마스 정
생사의 고비를 넘고 오른 유학길

토마스 정 회장이 집무실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토마스 정 회장이 집무실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여의도 공항 떠나 나흘 만에 몬태나주 도착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건 아닐까’ 짙은 회한


1958년 9월 20일의 서울 여의도 공항. 조국의 늦가을 하늘은 유난히도 아름다웠다. 배웅 나온 가족 친지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는 서둘러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승객은 20여 명 남짓. 대부분 일본가는 손님들이었다.

언제 학업을 끝내고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 여행길이어서 만감이 교차했다. 당시는 아직 김포공항이 완전히 복구되기 전이어서 여의도가 대한민국의 유일한 국제관문이었다.

숨을 길게 들여마시는 순간 짙은 회한이 내 머리와 가슴을 짓눌렀다. 혹시 내가 비겁한 건 아닐까. 나 혼자 잘 살겠다며 도망치다니. “용석아, 너 어디 있니. 정말 보고 싶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출국 바로 전날, 젊은 여인이 집으로 찾아왔다. “아니, 제수씨가 어떻게….” 후배 김용석의 아내였다. 어린 아들을 등에 업은채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다며 나를 찾아온 것이다.

“정 선생님은 이렇게 살아서 돌아와 미국유학까지 가시는데 그이는 아직 생사조차도 모르고… 우린 이제 어떻게 살지요.” 내 옷소매를 붙잡고 흐느껴 우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이 안난다. 그저 함께 눈물만 흘렸던 기억밖에.

경상남도 진양이 고향인 나는 용석이와 대창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도 이 학교 출신이다. 노 전 대통령 묘역이 있는 봉하마을은 읍에서 약 5km 떨어져 있다.

내가 용석이의 한 해 선배였다. 함께 모교에서 교편을 잡아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육군종합학교에서 장교교육도 같이 받았던 것. 나는 8기생, 용석이는 9기생으로 졸업해 각각 소위로 임관했다.

전쟁이 터지자 군 당국은 초급장교가 절대 부족해 이른바 ‘먹물’ 좀 먹었다고 하면 2개월 단기훈련을 거쳐 소위계급장을 달아줬다. 수십명 병사들의 생명줄을 쥐고 있으니 훈련의 강도가 요즘 젊은이들 말 처럼 ‘빡’셌다.

후보생 과정이 끝나고 밥풀떼기 하나를 달았다. 계급장이 부족해 대신 밥풀을 철모에 붙였다는 얘기가 우스개처럼 떠돌았던 시절이다.

그렇게 소위가 된 나는 뜻하지 않게 중화기 중대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동기생들은 시쳇말로 ‘꿀보직’을 받았다며 부러워했다. 한낱 소위에 불과한 내가 대위 보직의 중대장에 임명됐으니 그럴만도 했다. 교육성적이 우수한 때문인지 졸지에 ‘중대장’이 된 것이다.

강원도 양구의 8사단에 배치되자 마자 전투에 내몰린 나는 어느날 용석의 동생으로부터 ‘형이 실종됐다’는 참담한 소식을 들었다. 시신을 못찾았은 걸로 봐 포로로 끌려갔을 게 틀림없었다.

드디어 노스웨스트 프로펠러 항공기의 육중한 몸체가 굉음을 토해내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서울 시가지가 잠깐 보이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륙한지 얼마 안돼 강원도의 헐벗은 산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저 곳에서 거의 매일 삶과 죽음을 맞닥트리며 살아왔는데. 내가 미국을 가다니 믿기지 않았다.

내가 군생활을 했던 양구는 북쪽 철원의 ‘피의 능선’과 ‘철의 삼각지’로 이어지면서 6.25때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중의 하나였다. 우리가 고지를 점령하면 곧바로 적의 반격이 이어져 숨돌릴 틈도 없이 싸웠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임관하고 처음 중대장에게 신고하러 가는 길에 포탄을 맞고 숨진 전우도 있었다. 주위가 전부 산악지대여서 미군의 전차나 포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우린 쉼없이 전선에 내몰려 전진, 또 전진해야 했다.

양구의 ‘펀치볼’ 전투는 나중에 가곡 ‘비목’의 배경이 됐다고 들었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복무를 했다는 어느 시인이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을 보고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모를 비목이어라~.” 적막의 두려움과 전쟁의 비참함, 그 때문에 더욱 간절한 향수가 짙게 배어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피곤이 엄습해 왔지만 그 뿐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세계에 가슴이 설레이는가 하면 한편으론 불안감이 나를 휘감았다. 돈도 없고, 영어도 시원치 않고, 아는 사람도 없고. 그야말로 없는 것 투성인데….

나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빛바랜 수첩을 꺼내들고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포켓용 수첩엔 동기생 199명의 인적사항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전사자와 실종자는 빨간 줄로 그어 생존자와 구분했다. 그러고 보니 절반 가량이 이미 ‘유고’ 상태였다.

유명을 달리한 동기생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겹쳐지는 순간 전쟁의 비정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뿐이 아니다. 중대장을 위해 하나 뿐인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려 했던 내 연락병. 그들 모두 이름모를 고지에서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비행기는 어느새 한반도를 벗어나 태평양을 나르고 있었다. 그제야 긴장이 스르르 풀리며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의 상흔은 훌훌 털어내고 오직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만을 생각하자. 이제 곧 세계 최강국 미국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데. 젖과 꿀이 흐른다는 현대판 가나안 땅~.

그렇게 조국을 애써 잊고 싶었는데 내 삶의 고비마다 버팀목이 되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첩’이었다. 사업에 실패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을 때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도 그 수첩이었다.

내 인생의 좌표이자 나침반이나 다름없는 수첩.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지금도 삶의 의욕이 불끈 솟는다. 나의 삶은 오롯이 그 수첩에 담겨있다고 해도 과장돤 표현은 아닐 터다.

나의 인생 제2막은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됐다. 공항에서 난생 처음 화장지라는 걸 봤다. 물에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종이. 불과 하루 전까지만해도 푸세식 변소에서 신문지를 비벼 밑씻개로 사용했는데.

가난한 한국의 청년에게 앵커리지 공항의 화장지는 신이 조화를 부린 물건인 듯 보였다. 누가 볼까 두려워 얼른 두루마리를 바지 주머니에 숨겨넣었다. 미국에서의 첫 날은 이렇게 화장지와 함께였다.

내 최종 목적지는 몬태나주의 미줄라. 여의도 공항을 떠난지 나흘만에 서부의 한적한 도시에 도착했다. 신이시여, 내게 축복을 주소서. 맘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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