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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얘기] ‘의미있는 삶’을 살아라(1)

1월은 한 해를 고민해보는 시간이다. 필자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처음 글 ‘삶의 능선을 넘어가며..’를 다시 읽었다. 처음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그때 느낌을 기억해보려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작게는 내 삶의 작품, 내가 할 수 있는 자아실현 딱 하나만 해보기로. 크게는 내 안의 진정한 나를 찾아 영원한 존재로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로. 삶의 진리를 찾아….”. 마지막의 ‘삶의 진리’란 단어가 새삼스럽다. 오늘 칼럼은 이 단어 사색과 함께 적어본다.

매일 반복되는 삶. 소중한 하루를 위한 삶의 진리는 뭘까?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일까? 어떤 삶이 ‘가슴 뛰는 삶’일까? 후회 없는 삶은 뭘까? 서서히 다가오는 질병과 죽음의 공포를 견딜 수 있는 ‘담대한 삶’은 뭘까?

성경 얘기를 잠깐 해보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간절히 아들을 원했다. 그리곤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이 100살에 임신이 불가능한 아내를 통해 기적적으로 이삭을 얻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애지중지하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도 아브라함을 아끼던 하나님이 소원대로 아들을 줘놓고선 얼마 뒤 제물로 바치라니 이 무슨 황당한 소린가?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물론 구약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확인한 후 숫양으로 제물을 바꿨다. 하지만 도대체 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이런 무리한 요구는 무엇 때문일까? 인간의 극한 한계를 시험하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참고로 이스라엘 민족의 성경은 다른 민족의 종교나 설화와 마찬가지로, 수천 년에 걸쳐 그네들만의 ‘총체적 상상’을 다듬어낸 ‘해석’과 ‘바램’이 담긴 이야기다.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 얘기처럼 오래전 종교와 신화, 설화 등은 실제 과학적인 사건의 서술보다는 ‘도덕적인 내용’ 전달을 중요시했다.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묘사보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주제였단 얘기다. 그 당시는 세상을 얘기할 때 사물의 배열보다는 ‘삶의 드라마’를 각색된 글로 남겼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통한 그들의 바람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이 무리한 요구는 도대체 무슨 도덕적인 내용을 전하고자 함일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을까? 지금 내 것을 포기해야 나중에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였을까? 삶에서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면, 그 큰 희생만큼이나 엄청난 보상이 뒤따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지는 않았을까?

심리학 전문용어에 ‘만족 지연(Delay of gratification)’ 이란 말이 있다. 당장 누릴 수 있는 만족을 늦추는 행위, 곧 희생을 말한다. 먼 훗날의 목표를 위해 충동적 욕구를 참고 즐거움을 뒤로 미루기다. 지금 바르게 행동하면 언젠가 ‘보상’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당장 손쉬운 만족을 늦추면, 곧 타인을 배려하면 미래의 시간에 충분한 보상을 받는다는 기대다.

희생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향한 ‘제물’로 나타난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리곤 카인과 아벨의 제물 이야기가 등장한다. 낙원에서 추방돼 죽음의 공포 속에 살던 인간이 하나님 분노를 피하고 사랑받는 방법은 자기희생, 곧 제물이란 것을 알게 됐다는 얘기다.

또한 아담과 그 후손은 하나님의 명을 어긴 대가로 평생 ‘노동’을 해야 하는 저주를 받았다. 노동 역시 훗날의 이익을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행위다. 희생과 제물, 노동은 똑같은 얘기다. 만족 지연에 따른 보상의 기대를 행동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지금 내 손에 있는걸 포기할 테니 나중에 더 좋은 것을 달라”는 표현인 셈이다.

그리고 보면 한민족 단군 신화도 비슷하다. 사람이 되기를 간청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신(환웅)은 쉽지 않은 고통과 희생을 요구한다. 쑥과 마늘을 먹으며 100일 동안 굴속에서 햇빛도 보지 못한 채 소원을 빌라고. 결국 자기희생, 곧 만족 지연을 감내한 곰은 사람으로 환생해 원하는 보상을 받았고, 희생을 참지 못한 호랑이는 보상받는 데 실패했다. 이 설화에서 말하는 우리 선조들의 바람과 메시지 역시, 당장 희생을 감수하면 훗날 커다란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을까?

앞 얘기로 돌아가 보자. 올바른 삶의 진리는 무엇인가? 최선을 다한 후회 없는 삶은 무엇인가? 오랜 세월 우리 선조들이 종교와 신화, 설화 속 은유적 표현을 통해 전하고자 한 삶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은 힘들더라도 결국 삶의 내리막길에서 느껴지는 편안함 아닐까? 당장 만족이 없어도 나중에 평화롭다면 그게 답이란 얘기는 아닐까? 나를 희생해 ‘그들’이 잘된다면 결국 내가 행복하단 얘기 아닐까? 나를 통해 네가 존재한다면 내가 뿌듯하단 얘기 아닌가? 당장 눈앞의 성취만을 추구하는 ‘소유의 삶’보다, 내 안을 보고 주변을 살펴보는 ‘존재의 삶’이 진짜란 얘기는 아닐까? 내 삶의 방향과 목적을 설정하고 마침내 이것을 해냈을 때의 ‘그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 아닐까? 마치 예수의 마지막 메시지 “다 이루었다” 처럼 말이다.

지금 말한 얘기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의미있는 삶’이다. 의미의 사전적 정의는 ‘가치’요, 가치란 ‘쓸모있고 중요한 것’을 말한다. 의미있는 삶은 ‘나는 쓸모 있고 중요한 사람으로 살았다’는 스스로의 느낌이 있는 삶이다. 쓸모 있고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당장의 달콤한 만족을 희생하는 삶이다. 의미있는 삶은 희생한 삶이요, 희생하면 의미있는 삶이다. 쉬운 길 마다하고 묵묵히 ‘의미있는 길’을 걸어가는 삶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희생은 무엇인가? 이것들을 제물로 바치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쉬운 길만을 가고 있나? 아니면 힘들지만 의미있는 길을 걷고 있나? 독자들도 고민해보자.


정승구 칼럼니스트 /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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