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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정](3) "내가 한국 김 처음으로 수입했습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3화> 국군포로에서 아메리칸 드림까지 토마스 정
<3> LA한인타운에 정착하다

구종서씨가 창업한  ‘구스 트레이딩 캄퍼니’는 대한인국민회관과 인접해 있었다. 제퍼슨 길의 국민회관. [중앙포토]

구종서씨가 창업한 ‘구스 트레이딩 캄퍼니’는 대한인국민회관과 인접해 있었다. 제퍼슨 길의 국민회관. [중앙포토]

6.25 전쟁에 함께 참전한 육군종합학교 전우들의 2009년 신년 하례회의 기념사진. 뒷줄 왼쪽에서 3번째가 토마스 정회장. [토마스 정 회장 제공]

6.25 전쟁에 함께 참전한 육군종합학교 전우들의 2009년 신년 하례회의 기념사진. 뒷줄 왼쪽에서 3번째가 토마스 정회장. [토마스 정 회장 제공]

부산세관 상사의 잡화점 인수 LA정착
은행원 등으로 투잡 뛰다 무역에 눈 떠


서던 일리노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기 얼마 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보낸이는 구종서. 그 이름 석자가 얼마나 반가웠든지. 그 분은 내가 부산 세관 근무시절 과장님이셨다. 서기관급이어서 꽤 높은 직위였다.

1950년대 세관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꿈의 직장’으로 불렸다. 약간 명을 뽑는데도 세관공무원 모집 공고가 나가면 수백명이 몰렸다. 하지만 성적순은 아니었다. 든든한 ‘빽’이 있으면 성적이 미달돼도 합격의 기쁨을 누렸으니까. 6.25 때 끌려오다시피 해서 전쟁터로 내몰린 병사들이 ‘빽!’하고 죽었다는 얘기가 결코 우스개는 아니었다.

나는 필기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뒷 배경이 없다고 1등을 떨어트릴 수는 없었을 터. 난 당당히 실력으로 ‘넘사벽’이었던 세관 진입에 성공했다.



처우는 형편없었다. 그 봉급으로는 혼자 살기에도 버거웠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뒷구멍 수입’이 엄청났다. 세관심사를 통과하려면 담당공무원에 돈을 찔러줘야 했다. 비리의 종합세트가 바로 세관이었던 것. 왜 ‘꿈의 직장’으로 불렸는지 그제서야 알게 됐다. 내가 미국유학을 결심한 것도 이 같은 부조리가 이유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구종서 과장은 당시 고위공무원 가운데 비리에 멀찌감치 비켜 서 있었다. 인품도 ‘젠틀’했다. 나하고는 비교적 죽이 잘 맞았다. 그런 분이 내게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우표 소인 찍힌 곳이 LA여서 의아했다. 한국에 계셔야할 분이 어떻게…. 알고 보니 1년 전 LA에 자리를 잡아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분의 자초지종 설명이 나를 충격에 빠트렸다. 세관 근무 당시 유럽 출장을 가 선진국들을 두루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대도시마다 차이나타운, 재팬타운이 있어 매우 부러웠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큰나라 미국에다 코리아타운을 세워보겠다며 무작정 LA를 왔다는 것이다. ‘꿈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그런데 갑자가 사정이 생겨 귀국을 하게됐으니 내가 와서 가게를 운영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내가 이뤄졌으면 좋겠다며.

가게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딴 ‘구스 트레이딩 캄퍼니.’ USC와 대한인국민회관과 인접해 있었다. 약간의 한국식품과 자개그릇 등이 진열돼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LA한인사회에서 구종서를 아는 사람은 나 말고 아무도 없다. 1년 여 머물다 돌아갔지만 그 분은 명실공히 코리아타운 최초 설계자다. 그 꿈 또한 원대했다. 오늘날 윌셔 불러바드의 번창한 거리를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구종서는 2000년대의 오늘을 내다본 선각자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구스’ 운영을 맡았지만 한국 그로서리는 이미 부패해 실제 팔 물건은 거의 없었다. 내가 LA에 온 것도 UCLA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서였지 장사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살 일이 급했다. 낮에는 유니언 뱅크에서, 저녁엔 메이 캄퍼니란 곳에서 ‘알바’를 했다. 소위 투잡을 뛴 셈이다. 잠은 가게 한 켠을 치워 매트레스를 깔고 잤다. 시간을 이대로 흘려 보낼 수는 없었다. 경제학 석사가 은행에서 한낱 텔러 노릇을 하다니.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우연한 기회에 ‘나카주가’라는 일본인 사업가를 만난 것이 계기가 돼 무역에 눈을 뜨게 됐다. 일본서 김을 수입, 판매하고 있던 그로부터 김의 유통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나카주가는 중간과정(일본)을 생략하고 한국서 김을 직수입하면 단가가 낮아져 시장규모가 커질 것이라며 내게 김 수입을 적극 권했다.

귀가 솔깃했다. 즉시 한국의 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달 후 쯤 김이 샘플로 왔는데 이게 웬일. 파릇파릇해야 할 김이 태평양을 건너는 사이 누렇게 변색돼 버렸다. 상품가치가 전혀 없었다.

여기저기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해결책을 찾아 봤다. 아주 간단했다. 김을 구우면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

드디어 한국산 김이 완제품으로 미국에 수입됐다. 한국서도 첫 수출이었다. 나카주가가 약속대로 전량 구입했다. 무려 1만 달러. 첫 거래치고는 엄청난 액수였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 당시 개스값이 갤런 당 평균 20 센트였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얼마나 큰 돈이었는지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란다.

한국의 생산업자에게 5000 달러를 송금하고 나머지 5000 달러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거금을 쥔 그 때의 그 감격이란. 솔직히 벼락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세상의 돈이란 돈은 내가 다 가졌다’며 기고만장했다.

요즘 한국서는 김을 일컬어 ‘바다의 반도체’라 부른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가 대한민국을 먹여살리듯 김이 어촌에서 그 역할을 해 낸다고 해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 동안 해산물 가운데 부동의 1위를 지켰던 참치를 밀어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선 김이 귀했다. 비싸서 1톳(100장)씩 사 먹지 못해 상인들은 10장씩 낱개 묶음으로 팔았다. 수출하느라 정작 밥상에선 귀한 몸이 됐다. 한국의 산업화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 것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김의 수출액은 거의 6억 달러에 이른다. 최대 소비처는 미국으로 한해 거의 1억4000만 달러에 육박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과거엔 해조류를 ‘바다의 잡초’따위로 여겼는데 이젠 건강식품으로 부각되고 있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특히 김은 일반 해조류보다 단백질 함량이 월등히 높다. 미국서 ‘수퍼푸드’로 불리는 이유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좋은 김을 고르는 팁을 소개해 드린다. 윤기가 나는지 불빛에 비춰보면 안다. 기름 바르지 않아도 매끄럽고 반짝반짝해야 상등품이다. 구멍이 많거나 회백색 점이 많으면 건강하지 않다는 증좌다.

요즘은 테리야키, 매운 맛 등 각종 맛을 가미하거나 아몬드, 코코넛 등을 첨가한 간식 김이 개발되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이 김의 종주국이라고 주장하지만 글쎄다. 미국서 일본산 김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코스트코에 한국산 김이 수북히 쌓여 있는 걸 보면 정말이지 가슴이 뿌듯해진다. 맘 속으로 한 번 크게 소리쳐 본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서 김을 수입했습니다. 애국자예요.”


박용필 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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