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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계로 떴다 미인계로 하루아침에 떼죽음

[조인스] 기사입력 2009/09/09 08:39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명릉(明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도동에 있다. 서인을 대표했던 인현왕후 민씨와 남인을 대표했던 장씨의 다툼은 결국 민씨의 승리로 끝났음을 보여주는 무덤이다. 사진가 권태균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명릉(明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도동에 있다. 서인을 대표했던 인현왕후 민씨와 남인을 대표했던 장씨의 다툼은 결국 민씨의 승리로 끝났음을 보여주는 무덤이다. 사진가 권태균

김춘택 초상.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손자 김춘택은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노론의 환국 모의를 주도했다. 결국 환국에는 성공했으나 그 방법이 옳지 못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귀양까지 가야 했다.

김춘택 초상.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손자 김춘택은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노론의 환국 모의를 주도했다. 결국 환국에는 성공했으나 그 방법이 옳지 못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귀양까지 가야 했다.

신성한 왕권의 전제는 국왕이 하늘을 대신해 정치를 한다는 사실에 온 나라가 동의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국왕은 초월적인 위치에 서서 정치를 해야 했다. 그러나 숙종은 개인의 애욕(愛慾)을 정쟁의 수단으로 사용해 잦은 정권교체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왕권은 강화됐지만 국왕은 더 이상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왕위에 앉은 필부(匹夫)로 전락했다.

三宗의 혈맥 숙종⑧ 갑술환국

후궁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쫓아내고 왕비에 오른 4년 후인 숙종 19년(1693). 숙종은 다른 여인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숙종실록』 19년(1693) 4월조는 “최씨를 숙원(淑媛)으로 삼도록 명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숙원은 내명부 종4품 후궁의 품계였다. 같은 해 10월 『숙종실록』은 “왕자가 탄생했는데 소의(昭儀:정2품)가 낳았다”고 전한다. 숙원 최씨가 훗날 영조의 생모가 되는데 흔히 궁녀에게 세숫물을 날라주는 무수리 출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문정(李聞政)은 『수문록(隨聞錄)』에서 인현왕후의 시녀 출신인 궁녀라고 달리 전하고 있다. 『수문록』은 최씨가 쫓겨난 인현왕후를 위해 한밤중 남몰래 기도하다가 숙종에게 발견됐으며, ‘옛 주인을 섬기는 최씨의 정성이 가상해 가까이한 결과 태기가 있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 무렵 서인들은 노론·소론 할 것 없이 정권 탈환에 부심했다. 노론에서는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손자 김춘택(金春澤)이 환국(換局) 모의를 주도했고, 소론에서는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爀)이 주도했다. 서인들은 ‘장다리(장씨)는 한철이고 미나리(민씨)는 사철이다’ 같은 동요를 만들어 퍼뜨렸다. 소론 김만중(金萬重)은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어 왕비 장씨를 비난하고 폐비 민씨를 옹호했다. 『사씨남정기』는 명나라의 유현(劉炫)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喬氏)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정실로 맞이하고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사씨가 폐비 민씨, 교씨가 왕비 장씨를 뜻하는 것인데 훗날 실제로 이 소설의 내용대로 전개된다. 『사씨남정기』를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은 이 소설 내용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서인들의 염원이었다.

그러나 남인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신년에 정권을 빼앗겼을 때 허적·윤휴를 비롯한 많은 당인이 사형당한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기사년 정권을 되찾았을 때 김수항·송시열 등 많은 서인을 사형시킨 일도 잊지 않고 있었다. 다시 정권을 빼앗기면 대대적인 정치보복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공존의 틀이 붕괴된 붕당정치는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사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됐다. 남인들은 서인들의 환국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가 선제 공세를 펼쳤다. 숙종 20년 3월 23일 우의정 민암(閔<9EEF>)이 숙종에게 서인들이 불령한 무리들과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환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음모에 가담했던 함이완(咸以完)이란 인물을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위협해 폭로하게 한 것이었다.

『숙종실록』은 “여염(閭閻)에서 떠도는 말로는 은화(銀貨)를 모아 환국을 도모하는 자가 있는데, 폐비와 귀인(貴人)도 은화를 냈다고 한다(20년 윤5월 22일)”고 전한다. 쫓겨난 폐비 민씨와 귀인 김씨(김수항의 손녀)가 서인들의 환국을 위한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말이었다. 또한 김춘택은 숙종의 고모이자 효종의 차녀인 숙안공주(淑安公主)와도 연결돼 환국을 도모했다. 공주의 아들 홍치상(洪致祥)은 숙종 13년(1687) 조사석(趙師錫)이 우의정에 제수되자 ‘후궁 장씨의 모친이 조사석의 여종 출신이기 때문에 이 연줄로 정승이 되었다’는 말을 했다가 숙종 15년 사형당했던 것이다. 이 원한으로 숙안공주도 서인들의 환국 모의에 적극 가담했다.

환국 기도에 대한 의금부 수사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는 서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중인이나 상인들이 대거 등장한다. 역관(譯官) 김천민의 아들인 동래 상인 김도명과 역관 김기문의 아들 김보명, 역관 변이보의 아들 변학령은 500냥씩의 정치자금을 냈고, 지전(紙廛) 상인 이기정과 동래상인 박세건도 200냥씩을 냈는데, 40냥을 낸 중인 강만태는 “일이 성사된 후에 좋은 벼슬을 준다고 해서 은화를 내고 동참했다”고 자백했다. 양인(良人)들이 더 이상 정치를 사대부만의 전유물로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의식이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남인 정승 민암의 고변으로 김춘택·한중혁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숙종 20년 3월 29일에는 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幼學) 김인(金寅)등이 맞고변했다. 우의정 민암과 병조판서 목창명, 신천군수 윤희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김인의 고변 중에 왕비의 오빠 장희재가 김해성(金海成)에게 돈을 주어 김해성의 장모로 하여금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김해성의 장모는 숙원 최씨의 숙모였다. 하지만 남인 정권 아래에서 남인들을 역모로 고변한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 김인의 고변은 무고로 정리돼 가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 20년 4월 1일 밤 2고(二鼓:밤 9~11시)에 승정원으로 갑자기 내려진 숙종의 비망기(備忘記)가 전세를 뒤집었다.

“군부(君父)를 우롱하고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직을 삭탈해 문외출송(門外黜送)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국청에 참여한 대신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명으로서 정권을 다시 서인으로 갈아치우겠다는 뜻이었다. 남인들이 장악한 승정원에서는 급히 복역(覆逆) 장계(狀啓)를 작성했다. 임금의 잘못된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이 복역(覆逆)이었다. 그러나 막 작성한 초안을 올리려고 할 때 다시 숙종의 비망기가 내려왔다.

“비망기가 승정원에 내려진 지 이미 오래돼 경고(更鼓)가 반이나 지났는데 전지(傳旨)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그 머리를 모아 서로 상의하며 (대신들을) 반드시 구제하려는 정상이 극히 분통스럽고 놀랍다.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옥당(玉堂:홍문관)을 모두 파직하라. 이번 복역(覆逆) 의논을 집에 있는 승지와 삼사(三司)라고 모를 리 없으니 마찬가지로 모두 파직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승지 전원과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킨 것이다. 간쟁 자체를 막겠다는 뜻이었다. 숙종은 입직한 오위장(五衛將) 황재명(黃再命)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아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을 쫓아내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병권 장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각각 서인 서문중(徐文重)과 신여철로 갈아치웠다. 이조판서 이현일도 유상운으로 갈아치워 문관 인사권도 서인에게 주었다.

숙종 20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다. 송시열·김수항·민정중 등 사사당했거나 유배지에서 죽은 서인 인사들이 복권되었고, 성균관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제사 대상에서 쫓겨남)당한 서인의 종주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다시 제향되었다. 숙종의 느닷없는 변심에 남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5년 전 남인들이 후궁 장씨를 이용한 미인계로 정권을 잡은 것처럼 후궁 최씨를 이용한 서인들의 미인계였다. 인현왕후의 동생 민진원(閔鎭遠)은 『단암만록(丹巖漫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숙빈(淑嬪:최씨)은 기사년 이후 임금의 굄을 받자 장씨에게 시샘과 고통을 크게 당해 거의 목숨을 보존할 수 없었다. 숙종의 유모 봉보부인(奉保夫人)이 인경왕후의 본가와 친밀했는데, 갑술환국 때에도 세상에서는 ‘김진귀의 아들 김춘택이 봉보부인을 통해 숙빈에게 계책을 주어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들려주어 대처분(大處分)이 있었다’고 하였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서인들을 역모 혐의로 고변했던 함이완은 물론 우의정 민암과 아들 민종도, 이의징·조사기·노이익과 왕비 장씨의 친신(親信) 궁녀 정숙 등이 사형당했다. 갑술환국 후 1년 동안 남인들은 14명이 사형당하고 67명이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다.

왕비 장씨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폐비 민씨가 다시 복위됐다. 그러나 서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던 양인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거꾸로 강만태는 난언(亂言) 혐의로 참형(斬刑)당하고 가산은 적몰(籍沒)됐으며, 김도명·변학령 등은 석방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숙종 때의 잦은 환국과 왕비 교체는 정당정치의 말기적 현상에 국왕까지 가담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잦은 정권교체를 통해 왕권은 강화됐지만 원칙을 상실한 잦은 환국은 국왕과 왕비마저도 파당적 지위로 격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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