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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분자] “13년차 간호사 맞아?”…이를 악물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4화> '간호사의 대모' 유분자
<2>낯선 땅에서 다시 초보 간호사로

1970년부터 3년간 밤번 근무했던 LA인근 벨플라워 카이저병원의 미숙아 집중 치료실이다. 실보다도 가는 핏줄에 주삿바늘을 몇 개씩 찔러야 했던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 [유분자 이사장 제공]

1970년부터 3년간 밤번 근무했던 LA인근 벨플라워 카이저병원의 미숙아 집중 치료실이다. 실보다도 가는 핏줄에 주삿바늘을 몇 개씩 찔러야 했던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 [유분자 이사장 제공]

1년 계약에 텍사스 근무 시작
말 어렵고 고된 업무 ‘이중고’
손가락질 싫어 끼니 거르고 일
LA와서도 ‘무덤조’ 밤샘 근무
투잡 뛰며 2년만에 가족 초청
필기시험 의무화 "뭔가하자"


1968년은 격동의 시기였다.

그해를 중심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3개 기업이 태동했다. 현대자동차(1967년 12월), 포항제철(1968년 4월), 삼성전자(1969년 1월)가 출범했다.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도 그해 개통했다. 경제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지만, 아직 한국은 가난했다. 그해 세계 평균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702달러였는데 한국은 3분의 1수준도 안 되는 190달러였다. 넉넉한 살림살이의 기준은 집 전화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됐다.

삶은 불안했다. 북한 무장게릴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1·21사태)은 전쟁의 악몽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실감케 했다. 간호사라는 직업 덕분에 이민을 결심했지만, 두 아이와 남편을 한국에 두고 먼저 올 수밖에 없었다.



#새 하늘 새 땅, 딱정벌레차

“We’ll land shortly at Los Angeles…”

먼길이었다. 기상악화로 일본 하네다에서 하루를 묵고 또 스무 시간 가까이 날아왔다. 도착 기내방송에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에서 LA를 처음 내려다 본 이민자들은 아마 그때 내 심정을 공감할 터다. 광활하다는 말은 미국을 뜻했다. 북쪽의 높은 산맥과 동쪽의 끝없는 사막, 서쪽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도시는 바둑판처럼 반듯했다. 새 하늘 새 땅의 첫인상이었다.

이민자들에게는 공항에 마중나온 사람의 영향이 크다. 내 경우는 대전간호학교 동기이자 KSC 병원에서도 함께 근무한 죽마고우 이신자였다. 그날 신자는 공항에 일명 ‘딱정벌레차’인 검은색 소형 복스웨건을 몰고 왔다. 신자가 어떤 차를 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자동차를 몰고 온 사실은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한국에서 여성 운전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친구의 ‘자가용’은 내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충분했다.

LA가 크고 풍성했던 것도 ‘아메리칸 드림’을 재촉했다. K마트라는 곳에서 난생 처음 컬러TV를 봤고, 한국에선 구경하기 힘든 바나나를 사과보다 싸게 팔았다. 크리스마스를 LA에서 보내고 1년 고용 계약을 한 텍사스로 다시 떠났다. 잘 살기 위해 미국에 왔으니 이제 돈을 버는 일만 남았다.

#‘pooped’ 공화국에서

내 이민살이의 시작도 고생이었다. 1969년 새해 첫날부터 일하게 된 파클랜드 메모리얼 병원에서의 간호사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처음 부딪힌 건 언어문제였다. 한국에서 미국인 간호사들과 오래 근무했던 터라 영어가 두렵진 않았는데 막상 근무현장에서 부딪힌 말은 내가 아는 잉글리시가 아니었다. 텍사스를 공화국이라고 생각하는 토박이 텍산(Texan)들의 억양과 속어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피곤할 때 ‘타이어드(tired)’를 그들은 ‘풉드(pooped)’라고 했다. ‘오 마이 갓!(Oh my god!)’이라는 탄식어는 ‘머시(Mercy)’라고 했다. 내가 알아듣건 말 건 의사는 물론 간호사들도 한 번 말하고는 그뿐이었다. 그러니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말을 이해 못 해 환자를 잘못 간호한다면 하루 아침에 병원에서 쫓겨날 수 있었다.

언어만큼이나 힘든 건 간호사 업무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 13년간 간호경력을 쌓았지만 미국 오기 전 수년간은 행정 업무를 했기에 진료 현장에서 손 뗀지 오래였다. 고생은 당연했다. 다른 간호사가 한 시간 만에 할 일을 몇 시간씩 붙잡고 있을 때가 허다했다. 약 이름 외우랴, 환자 돌보랴 내 무능력 탓에 끼니 거르길 밥 먹듯 했다.

밥을 포기하게 만든 건 자존심이다. “저 사람 십 몇 년 간호사 한 거 맞아?”하는 빈정거림이 뒤통수를 파고 드는 것 같았다. 52kg이었던 몸무게는 한 달 만에 45kg으로 7kg이나 줄었다. 한국서 잘나가던 간호사 유분자는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자 이를 악물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다. 3개월이 지나자 적응하기 시작했다. 운전면허를 따고 당시 월급과 맞먹는 거금 600달러를 주고 차를 샀다. 투잡을 뛰기 위해서였다. 두 블록 떨어진 다른 병원에 지원해 일했다. ‘월화수목금금금’의 1년 텍사스 생활은 텍산말처럼 ‘풉드(녹초)’ 그 자체였다.

#LA의 ‘무덤번’교대조

1970년 정초 LA로 돌아와 벨플라워의 카이저 병원에서 취직했다. 텍사스보다 업무는 훨씬 수월했다. 현장 진료에 익숙해진데다 급료도 훨씬 많았다.

LA에 정착하고 한숨 돌리니 그리움이 몇 배로 사무쳤다. 엄마의 손길이 가장 필요할 때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은 말로 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당시 국제전화비는 5분 통화에 40달러가 넘을 정도로 비쌌다. 하지만 수시로 한국에 전화를 걸어 아이들에게 보고싶다고 사랑한다고 울먹였다.

가족들을 데려와야 했다. 카이저병원 근무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한국으로 날아가 여섯살 큰딸부터 데려왔다. 아직 어렸던 세 살 막내아들은 2년 뒤에야 왔고, 남편(이규철씨·2010년 작고)이 이듬해 따라왔다.

가족이 다시 함께 살게되면서 다들 기피하는 ‘밤번(night shift)’을 자청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오후 11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 밤샘 근무조는 급여가 15% 많았다. 또 다른 이유는 낮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밤에 일하고 낮에 아이들을 돌보니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새벽 1시쯤 잠든 환자들을 보면 옆 침대에 들어가 같이 자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밤번은 진이 빠지고 기름을 빼는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무덤번(graveyard shift)’이라 불렀겠는가.

3년 만에 밤번을 그만두고 대신 투잡을 뛰었다. 주 5일 근무후 주말 이틀간은 사우스게이트에 있는 양로 병원에서 수퍼바이저로 일했다. 돈도 돈이지만 나중에 꼭 한번 양로병원을 운영하고 싶었다. 그 꿈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꾸고 있다.

몸은 고되도 투잡 근무덕에 은행 잔고는 한여름 무밭에서 무가 자라듯 쑥쑥 불어났다. 1년간 7000달러를 모았을 정도였다.

삶이 넉넉해지면 주변이 보인다. 1970년 간호사 제도에 큰 변화가 생긴 것도 동료 간호사들을 돌아보게 한 계기다. 그 전까지는 한국에서 온 간호사들은 필기 없이 면접만 통과하면 RN(Registered Nurse)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 이후 필기시험을 의무화했다.

뭉쳐야 살 수 있는 때였다. 뭔가 해야만 했다.

※유분자 이사장 약력

▶출생: 1935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학력: 대전여중(1952), 대전간호학교(1955), 숙명여대 약학과 입학(1955), 덕성여대 국문과(1959) 졸업

▶미8군 KSC 병원 간호과장, 대한적십자사 초대간호사업 국장

▶1968년 도미

▶텍사스 파크랜드 병원, 벨플라워 카이저 병원 RN 근무

▶남가주한인간호사협회 2대 회장, 재미간호협회 초대회장, LAㆍOC 가정법률상담소 이사장, 재미간호신보ㆍ해외한인간호원총람 발행인,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1983년 패스트푸드 체인 비지비(Busy Bee) 설립

▶포상: 보건사회부 장관 감사패(1978), 재미간호협회 공로패(1986),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공로 표창(1986), 가주하원 공로패(1992), 사단법인 여성재단 감사패(2002) 등

▶저서: 내일은 다른 해가 뜬다(2006), 그래서 삶은 아름답다(2016)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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