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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시원한 야자수 그늘에서

“모래사장 팜트리 두어 개가
서로 맞대어 서 있는 곳에
챙이 넓은 하얀 모자를 쓰고
주스를 마시는 나를 상상했다”

“시원한 야자수 그늘이 있는 해변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학교에 있는 딸을 데리러 가는 도중에 무심코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나온 말이다. 하와이 관광을 광고하는 듯하다. 곧 앞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청명하며, 흰 구름은 두둥실 떠다니고, 모래사장에는 팜트리 두어 개가 서로 맞대어 서 있는 곳에 챙이 넓은 하얀 모자를 쓰고 파인애플 주스를 마시는 나를 상상했다.

긴 비치 체어에 앉아서 무엇을 할까? 책을 읽을까? 음악을 들을까? 아니면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감상할까? 아니다. 난 아직도 좋아하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빨강머리 앤’ 6권의 책을 모두 읽을 것이다. 앤이 길버트하고 결혼하고 아이들까지 낳는 앤의 일생을 읽으며, 다시 한번 앤에게 푹 빠지고 싶다.

초등학교 때였다. 옛 친구를 만나러 간 아빠가 뜬금없이 문고집을 사 왔다.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고 설레며 만난 아빠 친구는 책 파는 외판원이었다. 액수가 커서 6개월 할부로 샀다. 없는 살림에 일 저지르고 왔다는 엄마의 핀잔에 애가 좋아하는 책 사준 게 그렇게 큰일이냐면서 오히려 역정을 내셨다.



이렇게 큰맘 먹고 산 문고집은 무려 50권이나 되었다. 25권은 주문한 그 주에 왔고 나머지는 두 주 후에 왔다. 반짝이는 빨간 하드카피의 두꺼운 책들이었다. 도서관에서만 봤던 이런 비싼 책이 내 것이라니 꿈만 같았다. 너무 좋아서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다. 책 읽는 나를 볼 때마다 아빠는 만족해하셨다. 신이 난 나는 보라는 듯이 방 한복판에 누워 책을 읽었다.

제일 처음으로 고른 책은 ‘소공녀’였다. 소공녀의 표지 화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까만 긴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귀여운 아이가 책을 가슴에 안고 다소곳이 눈을 아래로 내린 그림이었다. 입은 옷도 고급스러워 보였고 예뻤다. 단숨에 읽었다.

그다음으로 고른 책이 바로 ‘빨간 머리 앤’이었다. 파란 체크 무늬 셔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아무렇게나 쓴 빨간 머리 색깔을 한 주근깨 투성이의 여자아이가 씩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과연 이렇게 딸기 색깔을 한 빨간 머리가 있을까 싶어서 골랐다.

그날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거기에는 밥 먹게 그만 책 손에서 놓고 손 씻고 오라고 잔소리하는 아빠가 있다. 저녁 먹을 시간인데 동생 안 데리고 왔다고 다그치는 엄마가 있다. 툭 튀어나온 입을 하고 동생을 찾으러 가는 내가 있다. 어둑해져 가는 시간에 동네 한쪽 구석에서 자기 주무기인 ‘빳빳이’를 가지고 한창 친구들과 딱지치기에 열중하는 동생이 있다.

시원한 야자수 그늘에서 주저 없이 ‘빨간 머리 앤’을 읽겠다. 책을 읽으며 나는 가련다. 당장 내야 할 집 페이먼트 걱정하지 않는 곳, 딸아이 학교 걱정하지 않는 곳, 싱크대 물이 빠지지 않아 어느 배관공을 불러야 하나 걱정하지 않는 곳,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 걱정하지 않는 곳, 걱정이 없는 그곳으로 나는 가련다.


이리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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