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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지 못한 정치인의 꿈… “한국계 대통령 만들자”

[LA중앙일보] 발행 2021/03/22 미주판 4면 입력 2021/03/21 22:00

'활동가' 남문기

(1)1981년 팀스피리트 한미연합훈련에 참가한 남회장(가운데) (2)2016년 중앙일보 주최 사랑의 마라톤에 뉴스타 직원들과 함께. (3)2019년 투병중 설악산 대청봉 등반. (4)딸 에이미씨의 2013년 결혼식. (5)2019년 11월 간 이식 수술전 간제공자 사위 서지오 성씨와 함께.

(1)1981년 팀스피리트 한미연합훈련에 참가한 남회장(가운데) (2)2016년 중앙일보 주최 사랑의 마라톤에 뉴스타 직원들과 함께. (3)2019년 투병중 설악산 대청봉 등반. (4)딸 에이미씨의 2013년 결혼식. (5)2019년 11월 간 이식 수술전 간제공자 사위 서지오 성씨와 함께.

남문기 회장은 미주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그는 ‘한국계 미국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게 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한국정부를 상대로 한 재외국민참정권 부여 캠페인에도 앞장섰다. LA한인회장으로,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으로, 한나라당 재외국민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그의 족적을 되짚어 본다.

#사업가서 활동가로

남 회장은 1982년 300달러를 들고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주택은행(현재 국민은행)에 취직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택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랬듯이 이민 최기 3년간 빌딩 청소일을 하며 버텼다. 이후 1987년 부동산 에이전트로 부동산 업계에 뛰어들었고 1988년 9월 ‘리얼티월드뉴스타’를 설립했다.사업가 남문기가 단체장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91년 OC해병대전우회장을 맡으면서다. 남 회장에게 해병대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대학 등록금 마련이 어려워 선택한 것이 해병대 입대(266기)였기 때문이다.

이후 2000년 제26대 OC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아 1년간 봉사했다. 이후 재미해병전우회장, 미주한인부동산중개업협회장, LA한인회장,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 등 활동 범위를 미주 전역으로 넓혔다.

또 해외한민족대표자협의회 의장 등을 맡으며 해외에 거주하는 모든 재외동포들의 권익 신장에도 관심을 가졌다.

#직선 LA한인회장 당선

남 회장의 한인단체장 활동 정점은 2008년 LA한인회장 당선이었다. 해외 최대 한인사회의 대표라는 상징성 외에 당시 한인들의 직접선거를 통해 뽑힌 회장이었기에 의미가 더 컸다.

임기 2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굵직한 업적들을 남겼다. LA총영사를 현지 한인으로 임명하자는 캠페인을 벌였고 이명박 대통령 당시 김재수 변호사가 총영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밖에 ▶한인타운 자율방문단 신설 ▶올림픽 및 피코 일방통행 저지 ▶한인 정치인 지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연방의회 통과 지원 ▶LA시니어센터 착공 ▶재외동포 참정권 회복 등도 그의 업적이다.

또한 한인회의 봉사단체 역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회장 활동 당시 월평균 3000건의 민원을 처리했고 매월 무료 법률상담, 청소년 및 노인, 초기 이민자들을 위한 상담 활동도 했다.

한인회장을 마친 그는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장, 미주한인회총연합회장, 세계한인회장대회 공동의장, 해외한민족대표자협의회 공동의장 등으로 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750만 해외동포로 활동 확대

2011년 7월 18일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는 남 회장을 재외국민위원장에 임명했다. 그는 “당이 원하는 것과 750만 해외동포들이 원하는 것을 조화롭게 조정해 나가겠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등의 재외국민위원장 자리는 국회의원 3선 이상의 중진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남 회장의 위원장 임명은 파격이었다. 때문에 남 회장은 시민권까지 포기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진사퇴로 끝이 났다.

남 회장은 한국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목표 중 하나였다. 그가 한국 정치에 꿈을 꾸게 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얘기가 있다. 동갑에 성격조차 비슷한 홍준표 대표에 의해서 재외국민위원장에 발탁되면서 꿈을 키웠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LA한인회장때부터 재외동포들의 권익을 위해 누군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그의 이런 꿈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사업만 열심히 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쉬움을 갖는 사람들의 물음이다.

그는 동포청 설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동포들의 위상이 제대로 세워지려면 동포청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건강 악화 신호는 만 49세 때인 2002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간경화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극복했다. 하지만 2010년 다시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했다. 그 동안 무려 11차례의 수술을 받았고 2019년 11월 사위의 간을 이식 받아 회복하는 듯 보였다.

투병 중이던 2017년 그는 자신의 모교인 건국대에 1억원을 기부했다. 당시 본지와의 인터뷰 에서 그는 “평소 새벽 1시에 잠자리에 들고 잠은 하루 4시간밖에 자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국계 대통령 만들자

남문기 회장은 1998년 뉴스타장학재단을 만들었다. 그가 장학재단을 만든 것은 성장기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대학에 다녔던 그는 장학금의 필요성과 절실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장학금 수여식 때마다 그는 수십명의 장학생들에게서 한 가지 서약을 받는다. ‘장학금은 그냥 받는 것이 아니고 빌려주는 것으로 나중에 누군가에게 장학금을 되돌려주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한국계 미국 대통령을 염원하며 쓴 소책자(미국에 한국인 대통령을 만들자)를 나눠준다. 그는 그들이 나중에 서약대로 누군가에게 장학금을 주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하곤 했다.

“장학금을 받은 자녀의 생활태도가 바뀌었다는 얘기를 간혹 듣습니다. 제 노력이 실제 효과가 있는 겁니다. 제 꿈이고 우리 모든 이민자의 꿈인 한인 대통령도 나오겠죠.”

그는 자신의 파트너인 뉴스타 부동산 에이전트들을 독려해 해마다 적지 않은 금액을 장학금으로 나눠주고 있다. 지금까지 장학금 수혜자만도 1500여 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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