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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산책] 우리말 사랑의 큰 뜻

통일운동의 선봉장 백기완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아, 큰 어른 한 분이 또 가셨구나”하는 안타까움과 허전함이었다. 좌우 진영논리와 관계없이 참다운 스승이 너무 귀한 세상이라서 빈자리가 더 커 보인다. 지금 대한민국에 젊은이들이 믿고 따를 참 어른이 몇 분이나 계실까?

민중운동, 통일운동에 앞장서온 백발의 투사 백기완 선생의 주장에는 가슴을 때리고 울컥하게 만드는 내용이 정말 많은데, 나는 비겁한 겁쟁이라서 그저 먼발치에서 듣기만 해왔다.

예를 들어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 사는 게 사람의 삶이라는 ‘노나메기’ 정신이라든가, 통일은 곧 어머니를 만나는 일이라는 말씀에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아무튼 정치나 사상에 관한 부분은 잘 모르겠고, 내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빼어난 이야기꾼 백기완의 세계다. 선생은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의 서두를 장식한 ‘장산곶매 이야기’,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가로도 유명하지만 여러 권의 시집, 산문집, 이야기책을 펴냈고, 영화 극본을 쓰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단한 성취와 기여는 우리말 사랑이다. 그 분의 각별한 우리말 사랑에는 나는 무조건 공감과 존경을 표한다.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달동네, 새뚝이….

백기완 선생이 찾아내 널리 쓰이게 만든 우리말들이다. 선생께서는 ‘우리말은 곧 인류말’이라는 믿음으로 잊히고 숨겨진 우리말을 찾아내 세상에 널리 알리고, 새로운 말을 궁리해서 만들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는 글쟁이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또, 선생은 평소 말과 글에서 한자어와 영어, 일본어 같은 외래 어휘를 쓰지 않고 순우리말을 살려 쓴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분이 쓴 책들에는 불쌈꾼(혁명가), 땅별(지구), 한살매(인생), 배내기(학생), 덧이름(별명), 말뜸(화두), 갈마(역사), 든메(사상), 하제(희망), 새롬(정서), 쇠뿔이(영웅), 니나(민중), 아주마루(영원히), 달그럴(달그림자), 새뜸(뉴스), 들락(문), 눌데(방) 같은 곱고 정겨운 순우리말들이 가득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순우리말로만 글을 쓰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여간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백 선생의 글과 이야기는 많은 문화예술인과 문화 분야 활동가들에게 큰 영감과 자극을 주었다. 그를 따른 예술인은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시인 김지하, 미술사학자 유홍준, 춤꾼 이애주, 소리꾼 임진택, 가수 김민기, 화가 신학철, 가수 정태춘 등 문화의 전 분야에 걸쳐 있다. 그 까닭은 그가 설파하는 특유의 민족미학 때문이었다고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으로 알려진 ‘묏비나리’의 창작 과정도 감동적이다. 총15장으로 구성된 이 장시(長詩)는 독방 감옥의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태어났는데, 필기도구도 없이 입으로 지어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워 내놓은 것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부러워한 것은 모든 일을 크고 올곧게 생각하고 믿는 바를 힘차게 밀고 나가는 통 큰 사나이다움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떠나간 백기완 선생의 꿈인 노나메기 세상과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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