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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분자] ‘족집게 문제집’ 구해 한인 간호사 1만명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4화> '간호사의 대모' 유분자
<3> 백의의 수퍼우먼들

1972년 재창설된 남가주한인간호협회의 제 1회 정기총회 장면. 회장에 선출되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유분자 이사장 제공]

1972년 재창설된 남가주한인간호협회의 제 1회 정기총회 장면. 회장에 선출되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유분자 이사장 제공]

1973년 LA 무궁화학원에서 열린 RN 시험 준비반에 빼곡히 들어찬 간호사들&#60419;

1973년 LA 무궁화학원에서 열린 RN 시험 준비반에 빼곡히 들어찬 간호사들&#60419;

RN 필기시험 의무화 조치로
영어 미숙 한인 낙방 다반사
1973년 남가주간호협 재건
한국어 강의 개설 적극 지원
'비밀 문제집'덕 합격률 80%


나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귀한 직업과 천한 직업을 분류하는 나만의 기준은 ‘사회에 도움이 되느냐, 해악을 끼치느냐’는 것이다. 간호라는 업의 귀함은 사회적 위치가 아니라 귀한 생명을 돌보는 데 있다.

1960년대 말 취업 이민온 한인 간호사들의 생업은 귀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삶 자체가 헌신이었다. 대부분 남편보다 돈을 많이 버는, 이른바 ‘알파 어너(alpha earner)’로서 가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풀타임으로 근무해야 했다. 업무에 지친 몸을 끌고 집에 와서도 가사와 육아는 당연히 ‘엄마’의 의무였다. 벌이를 쪼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활비와 형제 자매들의 학자금으로 송금하는 효녀들이기도 했다. 수퍼우먼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삶이었다.

그들의 생업은 1970년 RN(Registered Nurse) 자격증의 필기시험이 의무화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정부로서는 외국 경력 간호사들의 현장 근무를 위한 안전장치였지만, 한인 간호사들로선 넘기 힘든 벽이었다. 3수, 4수는 기본이었다. 간호사를 포기하고 봉제공장, 식당에 취업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생명을 돌보는 이들이 귀한 업을 저버리고 있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남가주간호협회 재탄생

난관을 넘는 정답은 ‘함께’다. 미국에 먼저 온 동료 간호사들에게 수소문해보니 1969년에 나성한인간호원협회가 조직됐지만 비영리단체로 정식 등록되지도 않았고 실질적인 활동도 많지 않다고 했다.

조직을 재건하기로 했다. 텍사스에서 LA로 온 지 2년만인 1972년 8월19일 단체는 재탄생했다. 당시 한국 대한간호협회장인 홍신영 선생의 미국 방문 환영식이 열린 날로 맞췄다. 참석한 여러 간호대학 동문회 대표들은 그 자리에서 날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추대했다. 단체명을 남가주한인간호협회로 바꾸고 민병수 변호사를 통해 비영리단체 등록을 한 뒤 곧바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첫 번째 목표는 당연히 동료 간호사들의 RN 시험 합격 지원으로 정했다. 당시 RN 지원생들이 몰리던 곳은 LA시티칼리지의 ‘외국인을 위한 RN 클래스’가 유일했다. 하지만 영어 강의였기에 회화 실력이 부족한 한인들로선 시험 합격은커녕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찼다.

이듬해인 1973년 11월5일 수강생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상 첫 한국어 강의인 제 1기 RN 클래스를 개강했다.

RN시험은 5개 과목이다. 내과, 외과, 소아과, 정신과, 산부인과를 김정숙, 송장난, 이설자, 장재옥씨가 강사를 맡아 가르쳤다. 자원봉사를 한 강사들이나 생업을 걸고 공부한 학생들이나 모두 절실했다. 첫 시험에서 1기생 20명 중 7명이 합격했다. 좋은 성적이었지만 아직 부족했다.

고민하던 차에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필리핀계 간호사들의 합격률은 거의 100%였는데 그 이유가 자기들끼리만 공유하는 ‘족집게 예상문제집’, 족보 덕분이라고 했다.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다이아몬드 알을 낳는 족보

궁하면 통한다. 나중에 미주 한인 간호사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그날은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RN시험을 보는 후배들을 응원하러 시험장에 나갔던 참이었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필리핀계 여성과 마주쳤다. 손에 든 책을 보며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다. ‘저거다, 족보구나!’ 속으로 직감했다. 할 말이 있다고 그녀 손을 잡아 끌고 가서 책을 보여줄 수 있느냐 부탁했다. 100개에 가까운 객관식 문제와 답이 빼곡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꺼내 그녀에게 쥐여주며 문제집을 넘겨달라 부탁했다. 대충 50달러가 넘는 돈을 받아든 그녀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난 더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생큐”하고는 책을 품고 그 자리를 떴다.

시험장을 나온 나는 곧바로 협회 임원들에게 연락했다. 예상문제집을 얻었으니 시험 준비생들에게 내일 모두 ‘무궁화학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 다음날 수백 명의 시험준비생들이 무궁화학원 앞에 장사진을 쳤다.

짐작대로 그 문제집은 황금알 정도가 아니라 다이아몬드알을 낳는 거위였다. 문제집을 바탕으로 공부한 결과 합격률이 80%를 넘어섰다. 그후 30여년간 RN 리뷰 클래스를 통해 RN 시험에 합격한 간호사들은 LA만 3000명이고 전국 각지에 1만 명이 넘는다. 전문직 해외 이민의 효시이자 본류인 한인 간호사들이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운 RN 클래스는 지금 생각해도 내 생애 가장 보람있는 일이다.

#미주 전역을 하나로

RN 리뷰 클래스는 전국적인 히트를 쳤다. 콜로라도, 워싱턴, 펜실베이니아, 뉴욕 등 타주에서 강의 참여방법을 묻는 전화가 쇄도했다. 협회 임원들은 주 7일 밤낮없이 걸려오는 문의 전화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가족들에게 미안해 밤에는 집전화 코드를 뽑아놓기까지 할 정도였다.

중력의 법칙은 단체에도 작용한다. 핵심의 질량이 단단해지면 외연은 순식간에 확장한다. RN 클래스로 미주 전역 한인 간호사들에게 단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확인한 나는 전국의 한인 간호사들을 하나로 모으기로 했다.

마침내 1976년 7월30일, 재미한인간호협회(현 재외간호사회)가 창설됐다. 7000명을 헤아리는 북미 전역 한인 간호사들의 권익단체가 출범한 것이다. 초대 회장을 맡은 나는 학술대회를 매개로 간호 업무의 내실을 다지는 동시에 한국, 미국 주류사회와 네트워크를 이었다. 2년 뒤인 1978년 한국 대한간호협회와 공동으로 1회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미국의 한인 간호사 대표들이 학술회의를 위해 귀국한 사실은 당시 한국 주요신문들이 앞다퉈 보도했다.

재미한인간호협회의 정점은 1983년 전세계 93개국, 6000여 명이 참가해 LA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 19차 국제간호협의회(ICN) 총회에서 빛을 발했다. 당시 150여 명의 한인 간호사들은 빠짐없이 한복을 입고 참석해 대회의 꽃으로 떠올랐고, 각종 토론을 주도했다.

#팔자에 없는 신문 발행

뭉쳐야 산다는 생각과 한명이라도 더 간호사 시험에 합격시키려 했던 노력은 신문까지 발행하게 만들었다. RN 리뷰 클래스 강의 내용을 손쉽게 알려줄 수 있는 최적의 도구가 신문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쉽지 않았다. 지금은 컴퓨터 기술이 발달해 혼자서도 신문을 만들 수 있지만 당시엔 모든 걸 말 그대로 발로 뛰어야 했다. 기자가 원고지에 기사를 작성하면 원고를 식자로 쳐서 카메라로 찍어 조판을 한 뒤에야 인쇄를 할 수 있었다.

운영 비용도 큰 난제였다. 당시 간호사로 받던 내 월급이 1000달러 남짓이었는데 매달 인건비만 4000달러를 지출하느라 저금했던 돈까지 퍼부어야 했다. 수많은 이들이 피와 땀을 쏟은 끝에 1979년 새해 벽두인 1월5일 월간지인 ‘재미간호신보’ 창간호가 나왔다.

정말 시작은 반이라는 말이 맞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창간 한 달 만에 시카고, 댈러스, 뉴욕, 캐나다에 지국을 열었고, 3호가 발행된 1979년 3월에는 독일 지국까지 열었다. 독자들은 알찬 내용들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의 수험기’라는 RN 시험 체험기, 서동성 변호사가 집필한 ‘간호사를 위한 소송 법률 상식’, 전국 병원의 간호사 취업정보, ‘한인 간호사, 이런 점은 고쳐야 한다’는 설문조사, 간호사와 의사 커플의 알콩달콩 일상을 다룬 ‘우리는 부부’라는 인터뷰 코너 등은 히트를 쳤다. 이하성 소아과 전문의, 권중건 교정치과 전문의 등 현재 각 분야에서 권위자 반열에 있는 전문의들이 좋은 원고를 보내준 것도 신문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창간 5년째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신문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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