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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씨 "“왜 박 전 대통령 죽이라 했는지 알 것 같아"

[조인스] 기사입력 2009/10/23 16:06

북악산의 호경암 바위에 박힌 총탄 자국은 41년 세월이 무색하게 뚜렷했다. 17일 호경암을 찾은 김신조씨가 총탄 자국을 가리키고 있다. [오종택 기자]

북악산의 호경암 바위에 박힌 총탄 자국은 41년 세월이 무색하게 뚜렷했다. 17일 호경암을 찾은 김신조씨가 총탄 자국을 가리키고 있다. [오종택 기자]

서울 성북구와 종로구 경계에서 시작돼 성북천 발원지로 이어지는 1.9㎞의 등산로. ‘북악산 김신조 루트(Route)’로 불리는 이 등산로는 41년간 민간인 출입이 금지됐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습격을 감행했다. 김신조 루트에 위치한 호경암에서 공비 3명이 사살당했다.

북악 골프연습장 앞 산책로 입구의 파란색 철문은 비무장지대(DMZ)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김신조 루트는 ‘서울 속 DMZ’라 불렸다. 24일 그 철문이 열린다. 김신조 루트, 정식 명으로 ‘제2북악스카이웨이 제2코스’가 민간인에게 개방되는 것이다.

개방을 일주일 앞둔 17일, 목사가 된 김신조(67·서울성락교회)씨와 그 길을 찾았다. 그는 그 길에서 남한 생활 41년과 기억 저편의 북한에 대해 얘기했다. 오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기다. 서울 성북구청은 수도방위사령부와 협의를 거쳐 군용 순찰로를 등산로로 개조했다. 이날 답사에는 지난 2년 동안 군 당국과 등산로 개방 협의를 했던 서찬교 성북구청장이 동행해 산책로 상태와 안전시설을 점검했다. 다음은 김 목사와의 일문일답(※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목사께서 닫은 길이 41년 만에 열렸습니다.

“나는 이 길로 퇴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이 길을 따라 도망쳤다면 동료처럼 저 세상 사람이 됐을 겁니다.”(※당시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앞 교전에서 패한 뒤, 삼삼오오 흩어져 퇴각했다. 김 목사는 인왕산을 넘어 도망치다 홍제동에서 붙잡혔다.)

-당시 습격 사건이 영화 ‘실미도’에서 재연돼 화제가 됐습니다.

“내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나랑 닮았더라고. 그런데 실미도에서의 (한국군)훈련량은 너무 적어요. 그래 가지고 김일성 죽였겠나….”

-68년 생포 당시 ‘김신조식 훈련’이 화제가 됐었지요.

“특수부대에서의 훈련은 ‘생존’에 관한 것이었지. 해발 1000m 이상 되는 산에 혼자 들어가 살아남는 훈련이었어요. 그런 훈련을 받는 10만 명의 요원 중 최정예 31명을 모아 124부대를 만든 겁니다. 청와대로 보내기 위해서요.”

등산로를 20여 분쯤 올랐을까, 호경암이 눈에 들어왔다. 높이 3m가 넘는 바위 중간쯤에 지름 5㎝ 정도의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은 총격의 흔적이었다. 호경암에 서면 멀리 여의도에서 김포까지 눈에 들어왔다. 김 목사가 바위에 난 총탄 자국을 만졌다.

“카빈이나 M-16 소총으로 쏜 거 같은데…, 세월의 풍파 때문에 구멍이 좀 커졌겠지. 죽었어야 할 사람이 이렇게 살아 있으니….”

-북에 있는 가족이나 동료와 연락이 닿은 적이 있나요.

“부모님이 인민재판에서 공개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형제들은 어찌됐는지 전혀 모르고. 몇 년 전인가, 국정원에서 ‘얼굴을 알아보겠느냐’고 사진을 가져왔어요. ‘청와대 습격 사건의 동지’였어. 별 4개를 달았더군. 배가 잔뜩 나왔더라고.”(※김 목사는 북으로 도주한 동지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정보당국은 그 인물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측근인 박재경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파악하고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보십니까.

“당시 난 김일성이 왜 박 대통령을 죽이려는지 몰랐어요. 살아보니 알겠더라고. 가난한 나라가 부자가 되는 게 두려웠을 게야. 경제가 살면 돈이 들어오고, 무기를 살 것 아닌가. 김일성이 볼 때 남한 공산화를 위해서는 박 대통령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거겠지. 난 박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남파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존경하게 됐어요.”

-한국에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두고 평가가 엇갈립니다.

“고도 경제성장의 업적은 인정해야지요. 요즘 경제는 위기고, 북한은 끊임없이 도발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이념적 대립과 빈부격차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고요. 이런 때일수록 사회를 바로잡고 미래를 보여주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정치가 바로 서야지요. 남한 사회가 분열되면 김정일을 돕는 셈입니다.”

-북한과의 긴장은 계속됩니다. 얼마 전 ‘임진강 댐 방류 사건’으로 인명 피해가 났습니다.

“일단 건드려 보고, 그 다음의 반응을 보는 전술이지. 그런데 남한에서는 피해 보고 나서도 ‘괜찮으니 그래도 협력하자’는 식으로 나오면, 그건 북한에 말려드는 거예요. 대북 정책에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사건이 재발이 안 되지요 .”

-요즘 국민들의 안보의식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6·25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젊은이도 많다고 하잖아요. 제 이름도 그렇고, 대한항공 폭파 사건의 김현희도 그렇고 점점 잊혀져 갑니다. 자신이 먼저고 이웃과 국가는 나중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무장공비 김신조가 목사가 된 사실에 많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나 혼자 붙잡힌 뒤 중앙정보부 주선으로 건설회사에 들어갔어요. 12년 다니다 나왔습니다. 교회에 나가게 된 건 순전히 마누라 덕분이지. 81년인가, 마누라가 자기 소원이니 교회 한번 나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마누라 생일(4월 30일)에 가봤는데, 마음이 편해져서 계속 나가게 됐지.”

-목사가 된 결정적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80년대 반공교육 많이 했잖아. 초등학생이던 애들이 집에 오더니 ‘아빠 이름이 교과서에 나온다’고 너무 싫어하더라고. 그땐 안기부(국정원의 전신)와 경찰의 감시원들이 늘 근처에 있었어요. 정부기관에서 전화가 오면 아이들의 목소리와 태도가 싸늘하게 변하곤 했지. 그 모습을 보고 ‘김재현’으로 개명을 했지. 그러곤 이사를 가서 새로 시작했어. 남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목사의 길을 택했고요.”(※김 목사는 1남1녀를 두고 있다. 딸이 73년생, 아들이 75년생이다.)

-정부 감시원이 지금도 근처 에 있을까요.

“없는 거 같아. 김영삼 정부까지는 분명히 있었고, 김대중 정부부터는 주변에서 인기척이 사라졌어요. 감시원이 사라지면서 나도 ‘이제 남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산행을 마친 뒤 김 목사는 “이처럼 경치가 좋은 곳을 못 오게 해서 미안할 따름”이라고 했다. 이마엔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41년 전의 김신조였으면 15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1시간이나 걸었구먼.”

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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