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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기억하자' 제정…전세계로 확산

[마더스데이의 유래]
1908년 여교사가 어머니 기리며 시작
연방 의회 동의·대통령 서명 이끌어
일년중 전화 통화량 가장 많은 날로

마더스데이는 순수한 목적의 시민들이 시작해 연방 정부의 지지와 대통령의 서명까지 얻어낸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의 어버이날을 비롯해 전 세계 모든 어머니의 날이 생기는데 영감을 준 것도 미국의 마더스데이였다.

20세기 초 웨스트버지니아 그래프턴에는 교사로 일하던 애너자비스(Anna Jarvis)가 있었다. 1902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단둘이 남은 그녀와 어머니는 친척들이 있는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3년 후 5월 9일 그녀의 어머니도 사망했다. 효심이 깊었던 그는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1907년 어머니의 두 번째 기일에 자신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 뒤 전국적으로 어머니의 날(Mother's Day)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어머니의 죽음 이전에 자비스는 이미 지역사회에 '마더스데이 워크 클럽'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지역 여성들에게 올바른 육아 방법 등을 소개하며 활동한 바 있다. 이런 그의 마더스데이 아이디어에 지인들은 열광했고 이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백화점을 운영하는 존 워너메이커의 재정적인 후원 약속까지 얻어냈다.

자비스의 노력 끝에 1908년 5월 10일 그래프턴에서 4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첫 번째 어머니의 날 행사가 열렸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좋아했던 카네이션 꽃을 참석한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자비스가 원한 것은 마더스데이가 법정 공휴일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는 신문과 정치인들에게 공휴일에는 남성을 기리는 휴일만 너무 많다고 주장하며 로비를 펼쳤다. 결국 1912년부터 로컬정부 차원에서 마더스데이를 공식 휴일로 정했고 1914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매년 5월 두 번째 일요일을 마더스데이로 정하며 연방 공휴일로 지정한다는 법안에 서명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연방 하원은 마더스데이 제정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상원에서는 “어머니의 날을 만들면 아버지의 날, 장모의 날, 장인의 날, 삼촌의 날 등도 만들어 할 게 아니냐”는 반대에 직면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자비스는 사회 각계의 저명인사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 보내는 여론투쟁을 펼쳤고 결과적으로 상원도 찬성했다. 자비스는 어머니는 한 분밖에 없다며, Mother’s Day라는 표기를 고집했고 이를 관철했다.

그러나 이후 꽃집들과 카드 회사들이 마더스데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들어 그는 상업화된 마더스데이에 거부감을 느끼고 사람들에게 꽃이나 카드, 사탕 등 선물을 사지 말라고 호소했으나 이미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뒤였다.

마더스데이는 미국에서 가장 전화 통화량이 많은 날이기도 하다. 로이터 통신은 2010년 기사를 통해 마더스데이 당일 통화량은 1월 1일보다 8%, 밸런타인스 데이보다 11%, 핼러윈보다 62% 많다고 전했다. 이렇듯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마더스데이는 세계 각국으로 전파됐고 한국에서는 1955년 8월 국무회의에서 5월 8일을 어버이의 날로 제정했다.

아픈 자녀 돌보고 고립된 아들 데려오고…
갓 출산한 자녀 못 보고 세상 떠나기도

코로나 사태에도 빛난 모성애


지난해 한국과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는 코로나19를 이긴 여러 가지 모성애 스토리가 화제가 됐다. 어머니는 강했고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어머니의 사랑과 강함은 더욱 돋보였다.

대구에 사는 A 씨의 네 살 난 딸은 지난해 3월 어린이집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됐다. 가족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부모는 감염을 피했지만, 어린아이는음압 병동에 입원해야 했다. A 씨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격리병실에 둘 수 없었다. 그는 직접 간호를 결심하고 마스크, 고글, 보호 장갑, 방호복과 덧신을 착용하고 24시간 아이를 돌봤다.

다행히 아이의 증상은 악화하지 않았고, 엄마도 감염되지 않았다. 9일 만에 아이는 엄마와 건강하게 퇴원했다. 병원 관계자는 “낯설고 무서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모녀가 서로 의지하고 힘을 주면서 버텼다”고 말했다.

경산의 B 씨 일가족은 지난해 3월 온 가족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B 씨에게는 생후 45일 된 아기가 있었고 한국 내 최연소 확진자로 기록됐다. B 씨는 고열에 시달렸지만, 아기를 돌보는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병원 측의 각별한 관심도 빛을 발했다. 아기는 위기를 벗어났고 체중 5㎏으로 건강한 상태로 돌아왔다.

인도에서는 홀로 스쿠터 오토바이를 타고 870마일을 달려가 아들을 구한 어머니가 화제가 됐다. 지난해 4월 인도 남부 텔랑가나 주에 사는 라지아베굼(49)은팬데믹으로 국가봉쇄령이 내려지자 이웃 주에서 발이 묶인 막내아들 걱정에 빠졌다.

지역 경찰에 읍소해 통행 허가증은 받은 그는 스쿠터 한 대에 빵을 비롯한 식량을 챙겨 대장정에 나섰다. 꼬박 이틀 걸려 아들을 만나는 데 성공했는데 인도의 모든 매체는 불가능을 이겼다고 평가했다. 베굼은 “여자가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먼 길을 가는 것은 어렵고 무서운 일”이라며 “오직 아들을 데려와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든 공포를 이겨냈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지난해 말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 사는 33세 산모 에리카 베세라는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의 뱃속에는 임신 9개월째인 둘째 아이가 있었다. 베세라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고 병원에서는 유도분만을 권유했다. 출산을 보름여 남기고 그는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후 산모의 상태는 한층 악화했다.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진 탓이다. 출산 18일 뒤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은 베세라가 아이를 낳은 뒤 한 번도 안아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딱 한 번, 의료진이 베세라의 뺨 옆에 아이를 데려간 적은 있지만, 베세라는 아이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각했다.

그의 남편은 “모두가 바이러스의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 이해하도록 하고 싶다”며 “나는 아이들의 엄마가 영원히 아이들의 심장 속에 머물도록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류정일 기자 ryu.jeongi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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