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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배우며] 김사장의 노후 준비

은퇴하고 아틀란타에 와서 김사장을 만났다. 친구 집에서, 골프장에서, 그리고 월요 등산에서도 그들 부부를 만났다. 은퇴하고 여유롭게 사는 것으로 보아 김사장 부부는 노후를 잘 준비한 것 같았다. 신발 고치는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고 했다. 신발 고치는 일은 사양사업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살던 오하이오의 한 도시에서도 세 사람의 한국인이 구두수선 가게를 하다가 가게도 팔지 못하고 문을 닫는 것을 목격했다. 김사장은 어떻게 그 일을 해서 돈을 벌었을까 궁금했다.

“몇 년도에 신발 고치는 일을 시작 했어요?”
월요 등산길에서 김사장에게 물어 보았다.
“1986년에 시작했지요.”
그는 그보다 10년 전에 미국에 와서 이일 저 일을 하며 구두수선 준비를 한 것 같다고 했다. 쇼핑몰 안에 잘되는 구두수선 가게를 보고 팔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주인이 65세가 되면 팔 거라 해서 기다렸다가 주인이 65세 되는 해에 찾아가서 가게를 샀다고 했다.

“어디서 구두수선 가게를 하셨어요?”


“테네시주의 멤피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프래스가살던 그레이스랜드가 있는 음악의 도시의 쇼핑몰 안에 있었지요.”
“구두수선 가게는 사양길이였는데, 거기서는 그때까지 잘 되었군요?”
“직원을 여러 명 채용해서 두 가게를 운영했지요. 유태인 부자들이나 고명한 예술가들은 좋은 신발을 신고, 조금 잘못되면 고쳐서 쓰더라고요. 단골 손님들이 많았지요.”
“장소가 좋았군요?”
“사업 운이 좋았지요. 큰 아들 데이빋도 도움이 되었어요.”

어떻게 큰 아들이 사업에 도움을 주었냐는 물음에 김사장은 다음 같은 이야기를 신나게 했다.

큰 아이가 비올라를 했는데, 고등 학생이 되자 여기 저기 연주회에 나가고 방송에도 나오고, 지방, 국가적인 음악 대회, 국제 음악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영국의 유명한 음악 대회에서 일등을 했다. 구두수선 가게에 고객들, 특히 음악가들이 찾아와, 데이빗 김이 당신 아들이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하면 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나에게는 Yes, Sir. 마누라에게는 Yes, mam, 그러는 거예요. 구두수선 가겟집 아들이 국제 음악 콩클 에서 우승 했다고 고객들이 찾아와 호의를 표하고 존댓말을 써요. 일생에서 그렇게 신나게 일해 본적이 없지요. 살맛 났어요. 고객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서로 존경 하는 관계를 가지는 것은 사업 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해요. 명절이면 그들과 선물을 나누고, 참 살만한 인생이었지요.”

김사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나도 큰 아들이 고등 학교 테니스 선수로 주 대항 경기에서 우승한 기사가 지방 신문에 났을 때도, 그리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되고 지방 텔레비전에서 인터뷰 방송 후에 우리 부부를 만나는 동네 사람들이 친절하게 인사하던 일을 생각했다.

“비올라를 하던 그 아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유명 음대가 미국뿐만 아니라 외국대학에서도 장학금 줄 터이니 오라고 했고, 아들은 대학원까지 장학금 받으며 마치고 지금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태녀 받은 비올라 연주자지요.”
“돈을 벌어서 어떻게 관리했어요? 어떤 분들은 금 덩어리를 사서 모았다고 하던데?”
“금을 사진 않았지요. 건물에 투자했지요. 은퇴하고 나서는 다 정리하여 이곳에 집들을 샀어요.”

그는 이곳에 6채의 집을 가지고 있다가 최근에 두 채를 팔아 나머지 집들 모기지를 다 갚았다고 했다.

“김사장님이 사업을 잘 한 비결이 뭘까요?
”사업을 해서 돈을 번 것은 사업 운 같아요. 사양 사업을 음악의 도시 멤피스에서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운이지요. 음악의 도시이기에 아들의 탤런트도 발굴 되고 각광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고, 아들의 음악적인 재능과 제 사업이 어울려 신나는 전성기를 보낸 것은 운이지요.“
”노후대책도 잘 하신 비결도 있나요?“
”아버지의 교훈이지요. 아버지는 이북에서 이남에 내려와 인조 공장을 했는데, 한 때는 잘 되다가 망했어요. 빚더미 안고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어요. 아들인 내가 3년 동안 아버지의 똥오줌을 받아내며 가난 속에서 살았어요. 내 뼛속에 새겨둔 교훈은 젊어서 열심히 일하고 준비하여 노후엔 아버지처럼 비참하지 말아야 한다. 늘 그런 감정과 생각이 있었기에 돈이 생겼을 때도 본때 나게 살기보다는 검소하게 살고, 은퇴후의 안정을 위한 투자를 생각했지요.“


김홍영 / 전 오하이오 영스타운 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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