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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그때 또 다시

허선영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대상 수상자

타입슬립(Time Slip)이란 어떤 사람 또는 집단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을 거슬러 과거 또는 미래에 떨어지는 일을 말한다. 사고에 가까운 초상현상이라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스르는 시간여행과는 구분이 되는 영화나 드라마의 중요 이야기 구도 이기도하다. 대표적인 영화로는 에쉬튼 커쳐의 나비효과, 러브 액추얼리와 노팅힐을 감독한 로멘스의 거장 리차드 커티스 감독의 어바웃 타임, 톰 크루즈 주연의 엣지오브 투머로우가 있다. 드라마로는 21세기 최고의 외과의사가 조선시대로 간 송승헌의 닥터 진, 조선 왕세자가 옥탑방 여자와 옥신각신 하는 옥탑방 왕세자, 아홉 번의 시간 여행을 다룬 이진욱 주연의 나인 그리고 최근에 호평을 받은 장나라 손호준 주연의 고백부부가 있다. 나는 타임 슬립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한다. 처음엔 신선했지만 너무 많이 차용하다보니 자칫하면 진부한 발상으로 치부되거나 깔끔하지 못한 스토리 전개로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평범한 현대극처럼 타임라인이 정확한 내용보다는 몇 배는 더 어려운 작업임을 알기에 타임슬립이란 테두리안에서 다양하게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상상해내고 또 이해하기 쉽게 글로 풀어내는 작가들을 존경한다.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 장나라와 손호준의 열연으로 중년의 권태로운 부부들을 위로했던 고백부부를 보며 타임슬립을 내 인생에 적용시켜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지금껏 열심히 살아 왔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며 살아 왔지만 정말 혹독하게 채찍질해서 있는 힘껏 다시 살아내라고 한다면 어느 시절로 돌아가면 좋을까?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때 그냥 돌아갔어야 했나? 결혼 전으로 돌아가서 실컷 더 싱글 라이프를 즐기다 서른 훌쩍 넘어 결혼할걸 그랬나? 대학 때 단체 미팅을 한번이라도 해볼걸 그랬나? 세월을 점점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생각해보니 가슴 치며 후회할만한 일은 그다지 없었다. 그렇다면 나의 삶은 나름 평탄한 셈인가? 흠, 이런 생각만으로도 제법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꼭 한번, 꼭 한번 나의 삶에 타임슬립이라는 소재가 주어진 채로 주인공이 되어야한다면 난 기꺼이 고1의 겨울방학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성룡과 전영록을 조금 좋아하다가 여고에 간 나는 누가 봐도 여성스럽지는 않았다. 아, 벗어나고픈 강한 유전의 왕곱슬 머리 때문에 단발머리를 하면 삼각 김밥으로 변하는 머리가 답이 없어서 언제나 숏커트머리를 하고 장국영처럼 떨어지며 눈앞을 귀찮게 하는 앞머리를 집게핀으로 고정을 하고는 청바지나 면바지에 면티나 남방을 입고 다녔다. 그나마 유일하게 멋 좀 낸다고 하면 신상 랜드로바나 아식스 운동화를 신고 아놀트파마 양말을 신어주는 센스를 잊지 않은 것이었다. 호탕한 웃음과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남성미 때문일까? 이상하리만큼 여고 시절에 나를 좋아하는 애들이 있었다. 지금은 동성애라는 단어라도 익숙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말도 모를 때라서 그냥 애해모호한 우정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주는 커피를 받아 마시고, 책상에 놓고 간 쪽지를 읽기도 했다.

힘없이 멈춰진 하얀 손
싸늘히 식어가는 눈빛
작은 그 무엇도
해줄수가 없었던 나


비라도 내리길 바랬지
며칠이 갔는지 몰랐어
그저 숨쉬는게
허무한 듯 느껴질 뿐
이제 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너는 없는데

야간 자율학습 쉬는 시간에 친구 경미가 쪽지를 슬쩍 주었다. 죽어버린 연인을 위한 가슴 아린 내용의 글귀. 아, 소녀감성 자극받아 눈물 찔끔 흘리며 누구의 시냐고 물었던 내게 경미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김종서 노래라고 말해줬다. 그때부터였다. 눈이 심하게 나쁜 탓에 귀가 극도로 예민한 나는 시계 초침 소리에도 공부에 집중을 못하겠다며 투덜대고 엄마한테 성질을 부리기도 했는데 소니카세트를 장만하고 김종서의 대답 없는 너를 듣기 시작했다. 인류는, 소녀의 감성은 점점 진화하는 법. 김종서를 필두로 이승철도 마스터 하고, 한국 문화만 문화냐, 외국 신문물도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노력으로 뉴키즈 언더블럭도 마음 깊이 사모하게 되다가 이윽고 고3때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면서 난~ 알아요를 흥얼거리며 대입 100일 전야 축하쇼를 기획총괄하고 공연까지 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연예인에 정신 줄을 놓아버리듯 성적도 놓아버렸다는 나만 슬픈 이야기... 정작 나에게 쪽지를 건넸던 경미는 한국에서 당당한 커리어우먼이 되어 있고 나는 어쩌다 미국에서 소심한 주부가 되어있다. 사람이 변화하게 되는 시기를 터닝 포인트라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 중 하나는 분명, 경미에게 쪽지를 건네받은 전과 후의 극명한 변화였다. 하지만 타임슬립을 생각하며 잠시나마 과거의 추억들을 꺼내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진다는 것은, 굳이 기를 쓰고 되돌아가서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 시절의 선영이도 매력이 있었고 나름 고민하며 열심히 살았던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타임슬립 운운하며 후회하기 보단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당당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잠깐, 앞에서 언급한 소심한 주부는 어울리지 않는데, 그렇다면? 내가 소심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 영어! 뉴키즈 언더블럭의 노래부터 다시 열심히 따라하며 영어공부를 해야겠다.

허선영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대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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