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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언론 첫 인터뷰-유나 리, 북한 억류 그후] "나중에 꼭 웃자" 남편이 보낸 소포가 희망의 끈

석방 이후 1년여 칩거 생활…많은 분께 걱정 끼쳐서 죄송
국경부근 독방감옥서 4일…땔감 냄새가 유일한 위안
지금은 쉬지만 다큐멘터리 사랑…아이들 삶에 대한 제작 맡을 것


지난해 8월5일 140여일간의 북한 억류 생활에서 벗어나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LA인근 버뱅크 공항에 내렸던 TV 방송 프로듀서 유나 리씨. 14개월이 지났다. 오프라 윈프리쇼 등에 출연했지만 당시엔 표정이 밝지도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4일 한인 언론과는 첫 인터뷰를 위해 기자를 만난 이씨는 경직됐던 예전보다 훨씬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잘 웃고 농담도 잘했다.

-그동안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했는데.

"좁은 곳에 혼자 있으면 좀 이상해지고… 갇혀 있던 곳이 생각났어요. 많이 우울해지기도 하고… 돌아온지 한 1년쯤 지나 올해 9월 정도부터 많이 괜찮아졌어요. 원래 다른 사람들과 아주 잘 어울린다든지 나선다든지 하는 성격은 못돼요."



-한인 미디어엔 모습을 안 보이고 미국 방송에만 출연한 게 좀 의아했는데.

"출연을 안 하고 싶었는데… 회사(커런트 TV)에 소속돼 있었고 회사가 석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줬습니다. 고맙기도 하고 직원이기도 하고요. 회사에서 희망하기에 출연을 하게 됐습니다."

-좀 내성적인 성격 같은데요.

"맞습니다.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다큐멘터리를 보여줄 욕심은 많은데 제가 중심에 서는 건 부끄럽습니다(웃음). 심지어 마켓이나 찜찔방 같은 데서 '유나 리 기자 아니세요?'하고 누가 알은체하면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반갑게 '아 안녕하세요?' 이래야 하는데 그것도 잘 안 되더라구요. 너무 많은 분들에게 걱정을 끼쳐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직접 보니 가냘픈 체구인데 어떻게 대담하게 북한 국경까지 갈 생각을 했습니까?

"2004년 나온 '서울 트레인'이라는 탈북자 관련 다큐가 있었어요. 그 걸 방송용으로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상세히 보게 됐습니다. '나는 한국 사람인데 나는 뭘해야 하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필드 프로듀서로 나서 첫 작품 제작을 위해 북한 국경으로 간 거였어요."

-결국 프로그램화 되지는 못했죠?

"네. 붙잡혀 끌려가는 과정에서 이미 찍었던 테이프를 일부러 손상시켜 못 쓰게 만들었는데 일부는 뺐겼어요. 그래도 메모들과 제 기억이 남아 있었습니다. 억류 돼 있는 동안에 일기도 썼구요. 다큐멘터리를 제작 못한 것을 책으로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쓰면서 마음의 정리가 많이 됐습니다."(유나 리씨는 취재 과정과 억류 당시의 경험을 담은 책을 지난 9월 출간했다.)

-북한군에 잡힐 때 상황과 억류 생활은.

"이젠 '다 지난 일이다'는 생각이 드네요. 중국 북한 사이 두만강 국경이었어요. 촬영 일정 9일 중에 8일째였습니다. 저와 로라 링 기자 그리고 남자 프로듀서 안내원 이렇게 4명이었습니다. 3월 17일이었는데 두만강은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안내원이 강변에서 미리 연락해둔 북한 경비원에게 신호를 보낸다며 부엉이 소리를 냈는데 답이 없었죠. 그런데도 안내원은 인신매매 경로를 보여 주겠다며 계속 북한 쪽으로 안내했습니다. 결국 북한 강둑을 밟게 됐는데 안내원은 탈북자들이 탈출을 위해 잠시 대기하는 거주지를 손으로 가리키는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왔습니다. 강 중간 쯤 왔을 때 뒤에서 소리가 나서 보니 총을 든 북한군 두 명이 쫓아 오고 있었어요. 달아나서 중국 강변으로 나왔는데 로라가 다리를 다쳐서 못 움직이는 겁니다. 그냥 체포당했습니다. 분명히 중국 국경 안으로 들어와 있었는데 북한군은 우리를 끌고 갔습니다. 풀이나 흙을 잡히는 대로 붙들며 저항했는데 결국 끌려 갔습니다."

-엄청난 공포를 느꼈겠습니다.

"국경 부근의 독방 감옥에서 4일 정도 있었는데…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춥기는 또 엄청나게 추웠고 추위 때문에 감옥에서 장작 나무를 땠는데 예전 할머니가 장작을 때실 때 맡던 그 냄새가 나는 거예요. 많이 울었지만 그 냄새가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한동안은 그들이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도 못잤습니다. 평양으로 압송해 갈 때는 그들이 산기슭에 자동차를 세우고 '내려서 공기를 좀 쐬라'고 했는데 그 때는 '내리면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내리지도 못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나요.

"재판 받고 나면 무죄가 되면 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12년 노동교화형이 나왔죠. 그 기간을 탄광 같은 데 가서 일해야 하는건데… 항소하려 했는데 재판 한번으로 끝이더라구요. 그때는 정말 절망이었습니다.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죽을 결심을 하셨어요?

"… 제가 잠을 잘 못자니까 수면제를 줬는데 그걸 모았어요. 어느날 '내가 죽어버리면 가족들은 이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면제를 한꺼번에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바로 30분 뒤쯤 미국에서 남편이 보낸 소포가 온 거예요. 안에는 제가 필요한 물건들과 노트가 있었는데 '이 노트에 지금 일을 잘 기록해서 나중에 꼭 웃으면서 회상하자'는 뭐 그런 내용의 편지가 있었어요. 다시 살아갈 힘도 그 소포에서 얻었어요. 12년형 판결이 6월8일에 나왔으니 귀환할 때까지 두달은 아직도 생각하기 싫은 순간입니다."

-LA 버뱅크 공항에 내릴 때 기억도 나죠?

"원래 로라가 먼저 내리기로 했어요. 비행기가 착륙해서 가족들이 보이자 클린턴 대통령이 저희를 조종석으로 데리고 가서 밖을 보게 했습니다. 딸과 남편의 모습이 보이자 제가 엉엉 울었어요. 로라가 '언니가 먼저 내려라'고 해서 제가 먼저 내렸고 그냥 눈물 바다가 되고 말았죠."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오신 건가요?

"1년 정도는 정말 어디 말도 못하고 힘들었어요. 이젠 좋습니다. 회사는 당분간 그만 두고 딸 야단도 치고 남편한테 적당히 바가지도 긁는 평범한 주부로 돌아왔습니다.(웃음)."

-어려운 일을 경험했는데 앞으로는 어떤 삶이 펼쳐질 것 같습니까?

"가족의 중요함을 절절히 느꼈어요. 북한 감옥에 있을 때 꿈을 꿨는데 제가 노래자랑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중간에 가사를 새까맣게 까먹었어요. 망신스러워 죽겠는데 딸이 무대로 뛰어 올라 오더니 같이 불러주는 거예요. 둘이 손잡고 끝까지 신나게 불렀어요. 남편은 아래서 박수치고 있고. 꿈에서 깨어나 희망을 보았죠. 지금도 그 마음입니다."

-가족 말고 세상 일은요?

"전 다큐멘터리를 사랑합니다. 아이들의 삶에 관한 제작을 계속 할려구요. 특히나 요즘 공립학교 시스템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아이들의 윤택한 생활과 환경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습니다."

■유나 리는

유나 리(Euna Lee)씨는 한인 시민권자 저널리스트다. 1996년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 오브 아트로 유학와서 영화와 방송을 전공했고 2005년부터 올해초까지 커런트TV(Current TV)에서 일했다. 2009년 3월 탈북자 관련 다큐멘터리 ‘비상구로의 탈출(가제)’ 제작 차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를 취재하다 동료 로라 링과 북한에 억류돼 국제적 관심을 받았다. 지난해 8월 4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석방 협상을 위해 북한을 전격적으로 방문해 김정일과 회담했고 두 사람은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왔다.

천문권.부소현 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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