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빈들 -고진하

임창현/시인·문학평론가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어려서 벼 다 베어낸 자리 메뚜기를 잡으러 갔었습니다. 마른 논 곁에는 작은 도랑이 흐르고, 안쪽으로는 수수밭이 있었습니다. 건너에는 콩밭, 콩이 노랗게 익고 있었고, 그 안에는 허수아비도 한 사람 있었습니다. 빛 다 바래고 찢어진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도랑에 물막이를 하고 발을 쳤습니다. 물이 빠진 도랑에는 한여름 살이 통통 오른 붕어, 미꾸라지, 메기들이 잔물에 팔딱거렸습니다. 어제 꺾어다 쪄온 찰수수대궁에서 수수를 한 알 한 알 까먹으며 날아오는 새들보고는 훠이훠이 저리가라 일렀습니다.

다 까먹은 수숫대를 잘라 허수아비 코에 곰방대로 걸어주었습니다. 새들이 그 곰방대를 보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었던지 허수아비 코를 타고 앉았습니다. 수수머리도 바람에 흔들거리며 허수아비 콧대를 기웃거렸습니다. 그리고 그뿐, 그 빈들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무엇 하러, 무엇을 채우려 거기 있었겠습니까. 신을 모르던 그 나이엔 답이 없어 허전하기만 했습니다. 그저 노을 속 어지럽게 나는 고추잠자리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빈들 가득 채우고 있는 것 보입니다. 당신, 당신이 보입니다. 하나님 아니 계신 곳 어디 있겠으며, 하늘 아래 당신 지으시지 않은 것 어디 있겠습니까. 반세기도 더 지난 후에 가보았던 고향, 빈들이었습니다.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