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빈들 -고진하
임창현/시인·문학평론가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어려서 벼 다 베어낸 자리 메뚜기를 잡으러 갔었습니다. 마른 논 곁에는 작은 도랑이 흐르고, 안쪽으로는 수수밭이 있었습니다. 건너에는 콩밭, 콩이 노랗게 익고 있었고, 그 안에는 허수아비도 한 사람 있었습니다. 빛 다 바래고 찢어진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도랑에 물막이를 하고 발을 쳤습니다. 물이 빠진 도랑에는 한여름 살이 통통 오른 붕어, 미꾸라지, 메기들이 잔물에 팔딱거렸습니다. 어제 꺾어다 쪄온 찰수수대궁에서 수수를 한 알 한 알 까먹으며 날아오는 새들보고는 훠이훠이 저리가라 일렀습니다.
다 까먹은 수숫대를 잘라 허수아비 코에 곰방대로 걸어주었습니다. 새들이 그 곰방대를 보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었던지 허수아비 코를 타고 앉았습니다. 수수머리도 바람에 흔들거리며 허수아비 콧대를 기웃거렸습니다. 그리고 그뿐, 그 빈들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무엇 하러, 무엇을 채우려 거기 있었겠습니까. 신을 모르던 그 나이엔 답이 없어 허전하기만 했습니다. 그저 노을 속 어지럽게 나는 고추잠자리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빈들 가득 채우고 있는 것 보입니다. 당신, 당신이 보입니다. 하나님 아니 계신 곳 어디 있겠으며, 하늘 아래 당신 지으시지 않은 것 어디 있겠습니까. 반세기도 더 지난 후에 가보았던 고향, 빈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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