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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구차한 '표절 인생'

이종호/논설위원

'송인(送人)'이라는 시가 있다. 학교 때 배운 뒤 지금까지 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한시 중의 하나다. 쟁쟁한 조선 선비들도 극찬해 마지 않았다는 유명한 시다.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堤草色多)한데/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라/ 대동강수하시진(大同江水何時盡)고 /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錄波)거늘.

풀이하면 이렇다. 비 갠 강둑에 풀빛 푸른데/ 남포로 님 보내는 구슬픈 노래/ 대동강 물은 언제나 다 마를꼬/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고 있거늘.

이 절창의 주인공은 고려시대 정지상이다. 서경(지금의 평양) 천도와 칭제건원(稱帝建元), 금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묘청의 난의 한 주역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에 대한 야사 하나. 정지상은 당시 개경 문단을 주름잡던 김부식과는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훗날 삼국사기를 썼던 바로 그 김부식이다.



어느 날 정지상이 오언절구 앞 구절을 썼다. 임궁범어파 천색정유리(琳宮梵語罷, 天色淨琉璃), 절집 독경소리 끝나니 하늘빛 유리같이 맑아졌구나. 김부식이 이 시구에 탄복해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뒷부분은 자기가 완성하겠다는 거였다. 정지상은 거절했다. 크게 모욕감을 느낀 김부식은 앙심을 품게 됐고 훗날 묘청의 난 때 제일 먼저 정지상을 제거했다는 일화다.

이어지는 이야기. 정지상이 죽고 난 뒤 어느 날 김부식이 봄을 즐기다 시를 지었다. 유색천사록 도화만점홍(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 버들은 천 실로 푸르고, 도화는 만 점으로 붉도다. 그때 문득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음귀가 된 정지상의 목소리였다. "누가 천 실, 만 점을 세고 있겠느냐? 유색사사록 도화점점홍(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 버들은 실실이 푸르고, 도화는 점점이 붉도다가 좋겠다"며 한 수 가르쳤다는 이야기다.

김부식은 당대의 문장가요 권력자였다. 좋은 글, 멋진 표현에 대한 욕심도 그만큼 컸을 것이다. 그래도 타고난 문재(文才)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야코가 죽었다. 그게 응어리가 되었던 걸까. 라이벌을 봐 넘기지 못하고 끝내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 이들에 얽힌 '전설따라 삼천리'다.

그래도 처음 김부식은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베끼거나 훔치지 않고 달라는 말이라도 했으니 말이다. 요즘은 아예 시치미 뚝 떼고 제 것인 양 통째로 '해 드시는' 양심불량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문학 작품은 물론, 학술논문, 노래 가사, 드라마 영화 대본에 심지어 신문 기사, 설교문까지 남의 것 훔치기는 전방위 트렌드가 됐다. 오죽하면 '복붙'이라는 억지 단어까지 생겼을까(카피&페이스트, 즉 복사 후 붙여넣기의 준말로 인터넷 네이버사전에도 올라있다).

작가 신경숙 표절 사건이 잠시 주춤하다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출판사 창비 편집주간이 표절이 아니라고 옹호한데 이어 진보진영 원로로 존경받던 백낙청 편집인마저 신씨를 두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문자적 유사성일 뿐이며, 의도성이 없었다"는 게 변론의 요지다.

하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초등학생이 봐도 베낀 게 뻔한 것을 왜 해괴한 논리로 구차하게 아니라고 우기는가, 라는 것이다. 물론 기억해 둔 좋은 글 멋진 표현, 자기도 모르게 가져다 썼을 수도 있다. 나만 해도 앞의 한시 '송인'을 얼마나 우려먹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일은 경우가 다르다. 그 정도의 (유명)작가라면, 그 정도의 (중견)학자라면, 그 정도의 (시대)양심이라면, 나아가 그 정도의 (대형)출판사라면 자기 검열의 기준도 그만큼 높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대중의 기대다.

결국 제 분수를 몰라서 생긴 일이다. 깜냥도 안 되면서 능력 이상의 일을 감당하려니 탈이 나고 뒷수습도 안 되는 것이다.

좀 부족하면 어떤가. 분수껏, 능력껏 사는 것이 남 따라 살고, 남의 것 훔쳐 사는 '표절 인생'보다는 백 배 낫지 않은가. 글의 생명은 화려한 문체, 멋진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독창성에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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