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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고운님 기다리는 동짓달 기나긴 밤

이종호/논설위원

#. 오늘은 동지(冬至)다. 1년 중 가장 밤이 긴 날이다. 요즘처럼 전깃불도 없었으니 오죽이나 어둠이 길고 깊었을까. 16세기 조선의 유명 기생 황진이는 그 긴 밤에 빗대 어 그리운 정인(情人)을 기다리는 사무치는 심정을 읊었다. 일찍이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 선생이 조선의 시 전부를 버릴지라도 황진이의 이 시 한 수와는 바꿀 수 없다고 극찬한 바로 그 시조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 밤이 가장 길다는 것은 이날부터 다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뜻. 해서 우리 조상들은 동지를 새롭게 생명력이 충만해지고 광명이 부활하는 날이라 여겨 '작은 설'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날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을 터. 액운을 쫓는다는 의미로 팥죽을 쑤어 먹었던 것 말고도 서로 간에 진 빚을 청산한다거나 이웃간에 쌓인 묵은 감정을 털어내는 기회로 동지를 이용했다.

또 궁을 비롯한 관청에선 동짓날 아침 왕에게 인사를 올리는 동지하례가 행해졌고, 동지헌말(冬至獻襪)이라 해서 웃어른께 새로 지은 버선을 선물로 드리며 무탈한 겨울나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지금도 연말에 작은 선물을 나누는 것이나 불우이웃 돕기 혹은 지난 한 해 쌓인 앙금을 씻어내는 자리들을 애써 마련하는 것은 이런 전통에 뿌리가 닿아있다 하겠다. 단순히 크리스마스 선물 나누기 같은 서양 풍속이나 좋지 않았던 지난 일은 모두 잊고 가자며 흥청망청 마시고 노는 일본식의 '망년회' 영향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 지금까지 이어지는 동지 풍속 하나 더. 곧 달력 나누기다.

조선시대엔 천문, 풍수, 지리, 택일 등을 맡아보던 관상감이라는 관청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기상청이라 할 수 있지만 관장하는 일은 훨씬 넓고 다양했다. 왕궁이나 왕릉 등의 명당을 찾거나 집터 잡는 일, 길흉화복을 점쳐 임금의 합궁일이나 궁중 대소사의 길일을 잡는 일 등이 그것이다.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각과 날씨 변화, 24절기, 일식.월식 등을 꼼꼼히 기록해 달력을 만드는 일도 관상감의 중요한 업무였다.

그렇게 만든 달력을 책력(冊曆)이라 했다. 책력엔 지금의 달력과 달리 날짜의 흐름만 죽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24절기에 맞춰 농경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담았다. 그 책력에 어새(임금의 도장)를 찍어 동짓날 관아에 배포했고 관원들은 또 이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여름 앞둔 단옷날엔 부채를, 새해 앞둔 동지엔 달력을 선물로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 한국의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가 선정됐다고 한다. '혼용'은 어리석고 용렬한 군주를 가리키고 '무도'는 정상적인 궤도가 붕괴된 야만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혼용무도란 어리석고 무능한 지도자 때문에 나라꼴이 말이 아님을 꼬집어 지적한 사자성어가 되겠다.

물론 이 말이 가당치 않다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떡하랴. 안타깝고 서글프지만 대다수 교수님들이 보는 한국의 현실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하긴 지난 한 해 그 많은 조언.직언.간언 다 외면하고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자기 길만 고집스럽게 걸어갔던 우리 대통령을 생각하면 전혀 아니라고 부인하기도 어려울 듯 싶다.

거기다 전세대란.취업대란.결혼대란, 입시지옥.교통지옥.분단지옥 등 온갖 '대란'과 '지옥' 타령에 '헬 조선'의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는 걸 보면 아직도 한국의 밤은 동짓달 밤 이상으로 길고 깊어 보인다. 그렇다고 황진이 처럼 그 긴 밤 허리를 뚝 잘라낼 수도 없으니…. 그저 혼미하고 용렬한 어둠의 시간이 빨리 가고 어서 광명의 새벽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더 가까이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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