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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산다는 건…

현세(現世)에서의 삶이 전부인가.

종교는 이 물음을 끊임없이 인간에게 던진다.

종교의 방점은 내세(來世)에 있다. 그래서인지 비유가 많다. 하늘이 본향인 기독교는 인생을 나그네의 삶으로 설명한다. 불교는 윤회로 실존 너머의 세계를 묘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현세의 '끝'을 말한다. 불가항력의 죽음이 그것을 분명하게 알린다. 그래서 죽음은 힘이 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인간이 결국 제한적 실체임을 깨닫게 한다. 세상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은 죽음이라는 그릇에 절대로 담길 수 없다.

삶은 죽음으로의 귀결이다. 누구나 반드시 마주할 현실이다. 어느 정도 피해서 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도착하게 될 종착지다. 그 앞에서 누가 겸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종교가 유한한 인생에 던지는 영원에 대한 물음은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 궁극의 물음 앞에서 가진 것을 과신하거나 맹신할 수는 없다.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말이다. 혹은 외모든, 학벌이든, 인맥이든, 지식이든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질 연기일 뿐이다.

현세의 가치로 치장된 '나'는 본래의 모습을 망각하게 한다. 본질의 '나'는 덕지덕지 붙은 것을 떼버리고 남은 게 실체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 그 사실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존재다.

사실 인생에서 갑을(甲乙)은 의미가 없다. 거기에 가치를 두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유한한 것을 얼만큼 소유했느냐에 따라 나뉘는 현세의 서열 따위가 생명이 담아내는 존귀한 의미 자체를 훼손하거나 하대한다면 그건 교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는 현세를 염세적으로 바라보는 걸 경계한다. 끝(죽음)이 있다고 내키는 대로 살겠다면 그만큼 무의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건 자유를 가장한 삶의 방종이다.

오히려 내세에 대한 소망은 현세를 함부로 살 수 없게 만든다. 종교가 현세가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인간에게 내세를 향한 진지한 고찰을 묵직하게 종용하는 이유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영원은 오직 내세에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그러니 사소한 것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자. 내가 남보다 더 가졌다면, 남 위에 서려고 하지 말고 낮아지자. 가진 게 없다고 해서 타인의 삶과 비교하며 좌절하지도 말자. 높디높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건물의 높낮이는 의미가 없어진다. 좋은 일이 지나간다면, 나쁜 일 역시 곧 지나갈 테다. 미움도, 슬픔도 다 한 때다. 현세의 이치가 그렇지 않은가.

각계각층의 종교인에게 새해 소망을 물었다. 지난주 종교면에는 그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저마다 종교인들이 전한 한마디에는 내세에 대한 염원이 묻어났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사는 것…그게 종교의 삶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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