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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3·1절에 생각하는 도산의 '독립전쟁론'

장태한/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연구소장

"나라를 위하여 몸을 버릴 때가 오늘이오, 피 흘릴 때가 오늘이라." 1905년 리버사이드에서 창립된 공립협회는 독립전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동포들에게 독립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공립협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강, 임준기 등 리버사이드 한인촌에 거주하고 있던 인사들과 함께 창립했다.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리버사이드와 레드랜드 등에 지방회를 둔 초기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단체이다.

도산 안창호는 독립전쟁론에 반대하여 '점진적 실력 양성론' 또는 '민족개량주의자'의 온건주의 노선을 주장한 것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창호 선생이 적과 대치할 때는 적을 파괴할 전쟁이 필요하다는 독립 전쟁론을 주창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910년 7월 중국 청도에서 안창호, 이갑, 신채호, 이강 외 여러 명이 모임을 갖고 민족운동 방향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도산 안창호의 동지이며 평생 독립운동을 함께한 이강은 이때 "밀산현에 있던 미군이 경영하는 땅을 사서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면서 사관학교를 운영하자"는 논의를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안창호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은 1908년 이후 의병전쟁이 점차 쇠퇴하고 군대도 해산되는 상황을 보면서 국권회복의 가능성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즉 안창호는 현실적으로 힘의 열세를 절감하면서 전면적인 독립전쟁론에서 독립군기지 개척으로 작전을 변경하게 됐고 1909년 설립된 대한인국민회는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중요한 단체가 된다.

또한 한국으로 돌아가 신민회를 조직한 도산 안창호는 해산된 군인을 대신할 군인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운동 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해 러시아의 항구 '해삼위'에 독립운동 기지 개척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이명화 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북미의 공립협회가 최고 사령부가 되어 국외 각처에 기지를 개척하여 한인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자 했던 거대한 플랜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이처럼 도산 안창호가 무장투쟁을 반대하며 그 세력과 대립했다는 지금까지의 학계의 주장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독립전쟁론을 지지했으며 군인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의 필요성도 인정해,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외세의 견제와 방해로 이 같은 계획이 실패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도산 안창호는 한국과 멀리 떨어진 지리적인 여건과 국권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은 독립전쟁을 수행할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대신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각자 교육을 받고 실력을 양성해 장기적인 독립항쟁과 독립전쟁을 준비하라고 한 것이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밀담으로 한반도의 미래가 결정되고 있는 현실에 도산 안창호 같은 지도자가 우리에게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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