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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여왕' '첫 여성 대통령'에서 '몰락'

사상 첫 파면·전직 대통령으로 3번째 구속
박 전 대통령 영욕의 19년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97년 정치에 입문했다. 박 전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걸어왔던 영욕의 19년을 되짚어 본다.

1979년 10·26 정변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뒤 청와대를 떠났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치에 뛰어든다. 그는 이 해 대선 직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원서를 제출했다. 이후 그는 초선의원 3년차인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된다.

2004년 한나라당 '차떼기'(불법 정치자금 수수)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빠지면서, 박 전 대통령은 '구원투수'로 당의 중심에 섰다. 당 대표로 등판한 그는 정당 역사상 유례없는 '천막당사'를 발판으로 '50석도 어려울 것'이라던 총선에서 121석을 얻는 결과를 보여준다.

2006년 6월 대표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2년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을 상대로 '40 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이명박 후보와 경쟁했지만 패했다. 2008년 4월 총선 때 친박 인사들이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는 아픔을 맛보기도 한다.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으로 이명박 정부와 대척점에 선다. 정치 입문 이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반대연설까지 하며 결국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킨다. 이 결과로 박 전 대통령은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고 충청권 민심도 끌어안게 된다.

2011년 12월, 그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당의 구원투수로 재등판한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상징색도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완전히 바꿨다. 외부인사도 대거 영입하면서 당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성공하고 2012년 4월 총선에서 야권연대로 맞선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한다. 이어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84%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며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됐다. 이후 2012년 12월 대선에서 득표율이 51.7%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승리하며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 이후 국내외에서 벌어진 일들은 대부분 악재로 점철되었다.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문부터 시작해 2014년 세월호 참사, 2015년 메르스 사태로 인사 검증 시스템과 국정 운영 능력에 의문을 드러냈다. 임기 중반 이후에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 여당 내 비박근혜계 지도부와 충돌을 빚었다. '레익덕'에 대한 불안은 박 전 대통령을 스스로 폭주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12·28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합의, 개성공단 폐쇄, 사드 체계 배치 강행 등 찬반이 첨예하게 맞붙은 사안을 밀어붙이며 '국론 분열'에 앞장섰다.

지난해 가을부터 드러난 '최순실 국정농단' 충격으로 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역대 최저인 5% 밑으로 추락하기까지 했다. 국회는 지난해 12월 10일 박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고 이후 92일 만인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 전 대통령에게 파면선고를 내렸다. 검찰조사(3월 21일)와 구속영장 청구(3월 27일), 영장실질심사(3월 30일)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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