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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투명인간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7/07/03 07:10

이소영/언론인,VA거주

어릴 적 막연하게 투명인간이 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비행기, 기차도 공짜로 타고 술래잡기할 때도 절대 잡힐 일 없으니 얼마나 좋을까. 그 상상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종종 한다. 물론 어릴 때만큼 순수한 목적은 아니다. 그런데 막상 바라던 대로 아무도 내 존재를 알아볼 수 없는 투명인간이 된다면 과연 기쁠까 의문이 든다.

두메산골 개운리에서 3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난 만수는 어려서부터 큰 머리에 비해 가느다란 몸통, 유난히 길어 보이는 팔다리, 토끼처럼 커다란 앞니를 가진 볼품없는 아이였다. 허약하게 태어난 데다 말도 늦고 매사에 이해가 더디다. 만수는 성석제 작가의 소설 ‘투명인간’(사진) 주인공이다. SF영화 속 투명인간들은 하나같이 초인적으로 그려진다.

투명한 몸을 이용해 손쉽게 악당을 물리치고 사회 정의까지 바로 세운다. 하지만 이 소설 속 투명인간은 어딘지 안쓰럽다. 잘난 것 없이 가족과 세상에 치이기만 했던 만수가 왜 투명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소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만수네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1900년대 이후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그대로 응축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관련 책을 소지했다는 혐의로 체포됐고, 그로 인해 가세가 기울자 아버지는 열두 살부터 지게를 지며 억척스러운 농부가 돼야 했다.

베트남전 파병 갔다가 고엽제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큰 형, 연탄가스 중독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지능이 낮아진 누나,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동급생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시집간 여동생, 노동운동을 하다 고문당한 남동생. 3대에 걸친 파란만장 가족사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다.

만수 집안의 부침이 유독 가슴 아픈 이유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사이기 때문이다. 고결한 양반 가문이 무너지고, 재력의 상징이던 논과 밭, 소들은 도시화에 휩쓸려 버렸으며, 전 재산인 소를 팔아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은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크게 방황했다.

집안의 기둥인 대학생 큰오빠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여동생들은 여공이나 식모가 되어야 했다. 만수 또한 그 격랑 속에서 가족과 동료를 위해 평생 희생만 하며 살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형이나 동생들을 위해 기꺼이 집안의 머슴이 되기를 자처하고 양보하는 일이 몸에 뱄다.

작가는 만수가 왜 투명인간이 됐는지 소설에서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굴곡진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처량할 정도로 순종적인 만수의 인생을 보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수많은 만수들의 희생과 노력을 바탕으로 초고속 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쓰고 버렸다. 소설 속 투명인간은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보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비정규직 근로자, 생계형 아르바이트, 파견 노동자들이 투명인간이 되어 경제를 움직이고 있다.

돌아보면 경제 성장 성과만 높게 평가해왔지 그 속에 녹아든 근로자들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왔다. 장남이라면 마땅히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아버지라면 마땅히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물어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기엔 늘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식구들 건강하고, 나 무사히 일 끝나고 하면 그게 고맙고 행복한 거라 여겼던 만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을 때는 가만히 참고 좀 기다려 보면 훨씬 나아졌다. 만수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만수는 왜 투명인간이 돼야 했을까?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한 결과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없는 사람인 양 죽어 지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회에 충실하게 복무한 뒤 기게 부품처럼 버려지는 만수의 모습은 이 시대에 인간은 사람인가, 소모품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세상은 여전히 투명인간 투성이다. 성실하고 착하디착하게만 살아온 변두리 인생이 어디 만수 뿐이랴. 소설 속 만수가 마지막에는 상징적 투명인간이 아닌 진짜 투명인간이 되어 자신을 착취하는 수많은 연결고리를 끊고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는 것처럼 현실의 만수들도 각박한 한 세상 그 종착점은 해피엔딩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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