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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일제 밀정, 안중근은 고종 밀명 받고 거사”

대한제국 관련 저서 4권 출간한 황태연 동국대 교수

올해 1월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을 출간한 황태연(62·사진) 동국대 교수가 지난주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을 잇따라 펴냈다. 지난해엔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도 냈다. 내년엔 『한국 근대화와 정치사상』(이상 청계출판사)을 펴낼 예정이다.

황 교수는 한때 마르크시즘 철학자였다. 1974년 서울대 외교학과 입학 이후 학생운동을 하며 마르크시즘을 접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에 유학해 마르크스 이론을 분석한 ‘지배와 노동’(91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랬던 그가 대한제국에 꽂힌 이유는 뭘까.

“박사학위를 받고 나니까 마르크스의 황금기가 더 이상 아닌 점도 작용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마르크스를 하다 보면 막스 베버를 하게 되고 마르크스와 베버의 동양관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동양관이 ‘동양 전제주의’로 같습니다. 이를 두고 강의 때 독일 교수와 논쟁도 벌였습니다. 동양에서 온 나는 그 테제가 맘에 들지 않았어요. 우리 역사를 봐도 신하들이 왕의 말을 따르기만 했나요? ‘전하,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가 얼마나 빈번했는데…. 서양에서는 좌파나 우파 모두 동양을 보는 시각이 잘못됐다고 느꼈습니다. 학위를 마쳐야 했기에 그 주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 수는 없었죠.”

‘동양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그의 시도는 94년 동국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본격화됐다. 공맹 철학을 중심으로 동양사상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한국의 근대사 관련 자료도 모아 나갔다. 동양과 서양의 고금(古今)을 가로지르며 문명의 형성 과정을 재구성한 연구 결과물이 『공자와 세계』(전 5권·2011), 『감정과 공감의 해석학』(전 2권·2015)이다. 그리고 동양 속에 위치한 한국의 특수성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 대한제국 관련 저서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Q :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고 조선시대와의 차이점은 뭔가요.

A : “대한제국 연구자에게 공히 인정되는 바는 조선은 전(前)근대 국가이고 대한제국은 근대국가라는 것입니다. 근대국가는 신분이 철폐된 사회이고 대의제가 실시된 사회죠. 서얼제도와 노비상속제는 고종 때 철폐됩니다.”

Q : 대한제국에 대의제가 있었나요.

A : “중추원이 대의제 기능을 했죠. 이 중추원이 일본 침략으로 더 발전을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일제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르는 게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중추원에는 과거 상놈들도 많이 들어갔어요. 황국협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 다 보부상 출신입니다. 당시 주요 정치세력인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세력이 중추원의 주축이었죠. 50명 중추원 의관 중 독립협회 계열이 17명 정도, 황국협회 계열이 28명이었고, 나머지 5명은 나이가 들어 대우해야 할 인물들이었습니다. 중추원이 고종의 제안으로 설립되지만 고종의 말을 들을 근왕파는 홍종우 등 서너 명뿐이었죠. 서양 말로 하면 ‘왕당파’는 줄인 것입니다.”

Q :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A : “독립협회는 처음 독립문 건립추진위원회로 출발하는데 고종의 조직이었습니다. ‘독립협회’란 명칭과 현판 모두 고종과 왕세자가 내려준 겁니다. 건립 자금의 17%는 고종과 세자가 내려준 내탕금이었고, 범국민적 모금운동을 하게 한 것도 고종이었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고종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출발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1898년 7월부터 성격이 변질됩니다.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가 일본에서 자기 세력인 이규완·황철·이정길 등을 한국으로 잠입시켜 왜인 거주 지역에 은거하게 하면서 독립협회를 배후 조종해 반(反)대한제국, 반(反)고종 변란단체로 바꿉니다. 그때부터 반러·친일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중심 의제가 됩니다. 이 정치결사들은 1898년 11월부터 1899년 1월까지는 암살과 폭란을 일삼는 폭력조직으로 변질돼 대한제국에 대한 변란세력으로 전락합니다.”

Q : 고종의 리더십 문제는 없나요.

A : “폭력으로 대하는 독립협회에 고종은 끝까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독립협회는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고립당해 자멸합니다. 고종이 독립협회를 탄압한 것이 아닙니다. 황국신문·제국신문·매일신문 등 거의 모든 언론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Q : 독립협회의 일반적 이미지와 다른데요.

A : “독립협회를 잘 알지 못하면서 띄우는 이들이 있고, 혹은 친일적 실체를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존에 독립협회를 애국적 단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의 친일을 증명하는 자료가 나오고 서재필·윤효정 등이 일제 밀정 역할을 한 사료가 나타나도 그런 사료들을 무시하고 감춰 버리기까지 합니다. 사료로 본 독립협회의 모습은 교과서에 나온 모습과 완전히 상반된다고 보면 됩니다.”

Q : 역사가 어떻게 그렇게 뒤집어졌나요.

A : “해방 후 최초 연구자들이 잘못한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로 이어지는 프레임은 교과서에서 어떻게 설명되나요? 개화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 실패했다고 하죠. 이것이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입니다. 우리 근대사를 기술하는 기본 프레임이죠. 해방 이후 많은 사가들이 식민사관 극복을 외쳤지만 그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부지불식간에 ‘은근한’ 친일적 기술로 끝났습니다. ‘노골적’ 친일은 최근에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Q : 한국 근대사를 직접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이나 충격적 경험이 있다면.

A : “말씀드렸듯이 우선 사료로 보는 한국사와 우리가 가르치고 배운 한국사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근대사의 시작을 대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술로 시작하는데 대개 고종이 동학을 탄압한 것으로 알고 있죠. 그런데 실제 사료를 보면 그렇지 않아요. 동학의 1차 봉기는 농민군이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삼남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곧 이어 2차 봉기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고종의 밀명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 밀지가 남아 있어요. 일본군이 그걸 빼앗아 일본공사관 기록에 남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료를 무시하고, 또 이 밀지의 누설을 막으라고 당부하는 전봉준의 친필 지시문도 무시해 왔습니다. 또 서재필의 일제 밀정 기록이 일본공사관 공식 기록에 나오는데 그런 것을 무시하고 서재필을 애국지사로 만들어 놨죠. 윤효정도 일제 밀정임을 정교가 『대한계년사』에 정확히 기록해 놨는데 오히려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움직였다는 점도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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