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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 인생은 실패와 좌절의 연대기

이소룡이 말했다. “산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여기 이소룡을 흠모하는 소심하고 외로운 남자가 있다. 현란한 쌍절곤 무술에 심취해 그 역시 이소룡처럼 높은 곳의 별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할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서자 신분으로 공기조차 당당하게 들이켤 수 없는 눈칫밥 인생이다. 태생부터 원조가 될 수 없었던 남자의 운명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모방과 아류, 표절과 이미테이션, 짝퉁 인생으로 흘러가게 된다.

천명관 작가의 ‘나의 삼촌 브루스 리’(사진)에는 이런 안쓰러운 운명을 가진 남자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나’의 시선으로 70년대부터 2000년까지 훑으며 삼촌의 일대기를 들려준다. 70년대는 다들 뭔가에 매혹된 시대였다. 온 국민은 독재자와 슬레이트 지붕에 매혹되었고, 독재자는 수출과 젊은 여자에 매혹되었으며, 젊은이들은 팝송과 이소룡에 매혹되었다.

당시 많은 10대가 그러했듯 삼촌도 ‘정무문’ 영화에 가슴 설레하던 평범한 사내였다. 쌍절곤을 휘두르다 뒤통수 한 번 안 맞아본 남자가 있었던가? 이소룡 같은 강한 주먹과 찰고무처럼 질긴 근육을 갖고 싶어 뒷동산에서 홀로 무술을 연마하다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액션 영화 스턴트맨으로 출연하게 된다. 그즈음 삼촌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 삼촌에게 순정을 바친 여고생이 임신 소식을 알리고, 삼촌이 결혼을 거부하자 같이 죽자며 청산가리를 마신다. 이 일로 삼촌은 지명수배자가 되어 서울 충무로에서 중국집 배달을 하며 숨어 지낸다.

태생부터 꼬였던 삼촌의 꽈배기 인생은 이게 다가 아니다. 이후 어렵게 번 돈을 몽땅 도둑맞고, 이소룡 대역을 뽑는 영화사 오디션은 밀항선이 고장 나는 바람에 홍콩 언저리까지 갔다 되돌아와야 했다. 지역 조직폭력배들과 몰려다니며 주먹질을 하던 와중에 신군부의 비상계엄 발령에 휩쓸려 삼촌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게 되는데…. ‘불운 올림픽’이 있다면 한국 국가대표로 당당히 출전해 세계 무대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남을 삼촌의 혹독한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이 세상 전체가 삼촌을 따돌리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이다.



70년대 산업화를 지나 80년대 군부독재와 민주화 혁명, 90년대 본격 자본주의 시대로 흘러가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논을 매고 소여물 주는 것이 일상이던 고향 마을이 대단위 공업단지로 바뀔 정도이니 말이다. 그 속에서도 삼촌은 변한 것 없이 바보스럽게 순수했다.그래서 더 많이 다쳤는지도 모르겠다. 부서지고 깨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인생일 터인데 삼촌도 그랬다. 이소룡처럼 영웅도, 주인공도 되지 못했지만, 인생의 구석진 곳을 떠돌며 꾸역꾸역 살아남아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모두 증명해주었다.

꿈이 있었지만 살면서 우여곡절을 겪다 보니 그 꿈은 우스꽝스러워지고, 무언가 이룬 것도 없이 실패한 경험만 한 가득한 인생. 주연은 고사하고 조연은 커녕, 단역도 아닌 엑스트라로 전락한 처지의 ‘나의 삼촌 브루스 리’를 보여줌으로써 천명관 작가는 삶이라는 건 원래 이렇게 고단한 것인데, 그래도 한번 살아볼 만은 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말이다.

천명관 작가는 소설을 쓰기 전에 영화 시나리오로 먼저 데뷔했던 작가다. 그의 장기는 소설 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마치 잘 짜인 시대극 한 편이 눈앞에서 상영되는 듯 생동감 있는 묘사가 압권이다. 그래서인지 눈으로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머리로는 영화적 상상을 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 작가는 소설이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장 느리고 완곡한 형태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작가의 말로 칼럼을 마무리할까 한다. “어쩌면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더라도, 그리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불행이 단지 부당하고 외롭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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