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강제 이주당한 체로키 인디언들의 슬픈 역사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눈물의 길 (Trail of Tears)

오클라호마시를 벗어나 40번 프리웨이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다 165번 지방도로를 지나면 머스코기라는 조그만 도시가 보인다.

머스코기 이후부터 오클라호마주 체로키 카운티다. 10여 마일 동쪽으로 평탄한 초원을 지나면 이름도 생소한 탈래코아라는 도시를 만날 수 있다. 탈래코아는 체로키 인디언 말로 곡식이라는 뜻이다.

2014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구 1만6496명의 소도시다. 들어가는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고 청결했다.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건물이 조화를 이뤄서 평온해 보인다. 길거리의 간판에 영어와 함께 쓰인 체로키 언어가 이색적이다.



오클라호마시에서 170여 마일 떨어진 탈래코아시는 체로키 인디언들이 조지아주에서 강제 이주해와 1839년 만든 인디언 마을이다.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큰 원주민 집단인 체로키 인디언 자치구의 수도다. 1844년 지어진 체로키 법원 빌딩과 체로키 인디언 관련 박물관들이 있다. 체로키 법원 빌딩은 오클라호마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건물이라고 한다. 도시 외곽의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체로키 인디언의 역사와 이 도시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다.

1830년 인디언 이주법을 만들고 실행한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에 의해 인종청소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미국 남동부에 흩어져 살던 체로키족, 축토족, 치카소족, 크리크족, 세미놀족 6만 명의 인디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해 오클라호마로 이동했다.

지금의 조지아주에 살던 체로키족 영토 주변에 금이 발견되면서 미국의 첫 번째 골드 러시가 시작되고 백인들이 몰려 들어왔다. 체로키족은 저항을 했지만 1838년 미국군대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클라호마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1만7000여 명의 체로키 인디언과 체로키 인디언이 소유하고 있던 약 2000명의 노예는 살던 집에서 미군들에 의해 끌려나와 위협을 당하며 3주간 이동해 수용소에 집결했다. 1838년 11월17일 수용소에서 출발해 테네시강을 따라 테네시주 채터누가와 앨라배마주 건터즈빌 ,테네시주 찰스턴을 지나 1839년 3월26일 목적지에 도착했다. 4개월 넘는 기간 동안 대략 1200마일 거리를 대부분 걸어서 이동했다고 알려졌다.

출발 전 수용소에서 이질 등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동 중에도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 모두 4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체로키족의 강제 이주를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의 고난은 실로 끔찍하고 지독했다. 이후에도 30여 인디언 부족들이 강제로 이주당했다.

1866년 연방정부가 인디언 준주의 명칭을 정할 때 제일 먼저 이곳에 이주해온 촉토족의 추장 앨런 라이트의 말을 받아들여 오클라호마로 정해졌다. 오클라호마는 촉토족 언어로 붉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미국정부는 오클라호마를 인디언들만이 거주하는 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1800년대 말에 백인들이 몰려들자 미국정부는 1887년 도스법을 통과시켜 인디언 땅을 강제적으로 줄여서 철도회사와 백인들에게 불하했다.

미국의 역사는 영국인과 유럽인들이 미 대륙을 침략해 토착민인 인디언과 300년 동안 벌인 갈등과 전쟁의 역사다. 미국은 탐욕스러운 백인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인디언들의 땅을 침략하고 인종 청소를 한 치욕의 역사를 안고 있다.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