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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 가장의 이름으로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7/09/11 07:26

여권을 만들자마자 제일 처음 갔던 해외 여행지가 중국이었다. 장가계 같은 유명 관광지를 돌고, 마지막 날 일정이 상해 도심 관광이었다. 그날, 상해라는 도시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하늘 높이 쭉쭉 뻗은 매끈한 고층 빌딩 숲 속에서 아찔한 기분을 느낀 것도 잠시, 빌딩 후문으로 돌아갔다가 또 다른 세계를 만났다. 빌딩으로 둘러싸인 방어벽을 넘자마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잣집이 나타났다. 판잣집 창문 사이로 빨랫줄이 길게 삐져나와 있었고, 발길에 채는 요강은 찰랑거리고 있었으며, 아직 연탄을 때는지 연통에서 매캐한 연탄가스 냄새가 났다. 불과 십 여분 만에 2000년대와 70년대를 오간 기분이었다.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성장한 중국의 단면이었다.

위화 작가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사진)는 대외적으로 보이는 중국의 화려함이 아닌 후미진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중국 서민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허삼관은 마을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간다. 피를 팔아야 건강을 증명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에 생애 처음 피를 팔고, 그 돈으로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인과 결혼한다. 이후 허삼관은 삶에서 고비를 맞을 때마다 피를 팔아 해결한다. 큰아들이 옆집 아이를 때려 치료비를 물어줘야 할 때도 피를 팔아 돈을 얻었고, 흉년에 옥수수죽으로만 연명해야 하는 가족에게 국수를 사 먹일 때도 피를 팔아 돈을 얻었다.

80년대 말, 마약 정맥주사와 동성애 문화가 밀려들자 중국 정부는 에이즈 예방을 위해 수혈 관련 제품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이내 중국에서는 채혈을 통해 돈벌이하는 혈액은행이 생겨났고, 당시 혈장(血漿) 경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채혈은 중국 하층민의 주요 돈벌이 수단이었다. 한 번에 400cc의 피를 팔면 35원을 받는데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농사를 짓는 것보다 많은 돈이다. 피를 팔러 가는 날이면 허삼관은 몸속 피를 늘리기 위해 ‘배가 아플 때까지, 이뿌리가 시큰시큰할 때까지’ 물을 마신다. 오줌보가 터질 때까지 오줌을 참고, 피를 뽑고 난 뒤에는 반드시 보혈과 혈액 순환에 좋다는 볶은 돼지 간, 데운 황주를 먹는다. 허술하기 그지없는 허삼관이어도 생활비를 벌기 위한 매혈에는 이토록 치밀했다.

국공합작과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몸을 파는 남자의 매혈기는 애처롭다. 사정이 급할 때는 한 번 피를 뽑으면 석 달은 쉬어야 하는 나름의 규율을 어기고 사흘 만에 또 피를 팔기도 한다.이 남자에게 시대와 상황은 너무나도 폭력적이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가장이기에 가족을 지키려면 자신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에서 허삼관은 모두 아홉 번 피를 파는데, 마지막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을 위한 매혈이다. 허삼관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세상은 급변해 이제는 피를 팔아도 얻을 수 있는 돈이 얼마 되지 않는 시대가 됐다. 게다가 허삼관같이 늙은이의 피는 잘 사 주지도 않는 시절이 와서야 남자는 생애 처음 자신을 위해 피를 판다. 이렇게 피를 파는 허삼관의 모습은 가장이기에 더욱 비장하게 느껴진다.

시대가 여러 번 바뀌어도 삶은 여전히 무겁다. 우리 곁에도 수많은 허삼관이 있다. 피를 팔아 살아간다는 점에서 허삼관에게 피는 노동력이고 돈이었지만, 다른 가장들은 땀, 신용, 자존심을 팔아 가족을 먹여 살린다. 신용을 팔아 대출받고, 그 돈으로 자식들 공부 가르치고 집을 산다. 허삼관이 피를 판다고 마냥 애처롭게 볼 일이 아니다. 요즘 세상에 신용 안 판 가장은 없을 테니 집집이 허삼관 한 명씩 있는 셈이다.

들여다보면 대단히 씁쓸한 주제이지만, 소설은 시종일관 익살스럽다. 허삼관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삶이 한 편의 시트콤(situation comedy)처럼 묘사돼있다. 노동과 빚으로 꾸려가는 팍팍한 삶이어도 매일 어둡지만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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