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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마음을 읽는 책장]가짜 빛을 좇는 사람들

시작은 그랬다. 백화점에서 5만엔짜리 화장품을 사려는데 지갑에 2천엔 밖에 없었다. 마침 가방 속엔 고객에게 수금한 예금이 있었다. 잠시만 꺼내 쓰고 금방 채워 넣으면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그때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은행원 우메자와 리카가 잠깐 쓰고 돌려놓으려 했던 돈은 점점 액수가 커졌고, 빚더미는 리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급기야는 고객 예금증서를 위조하는 수법으로 야금야금 횡령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횡령한 돈이 1억엔(약 10억원)에 이른다. 리카 부모가 당장 큰 수술을 받아야 했거나, 거액의 빚 독촉에 시달리던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내연남과 밀회를 즐기고, 명품을 쇼핑하는데 모두 썼을 뿐이다. 어쩌다 리카는 양심 없는 범죄자가 됐을까?

가쿠다 미쓰요 작가가 쓴 ‘종이달’(사진)은 리카의 회상을 중심으로 리카와 알고 지냈지만,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친구 세 명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리카의 욕망은 가난한 대학생 고타를 만나면서 폭발한다. 돕고 싶어 고객의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한 뒤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돈을 쓰는지, 돈을 쓰고 기쁜지 슬픈지조차 무감각해진 순간, 리카는 더는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게 된다. 없으면 항상 돈을 생각하지만, 많이 있으면 있는 게 당연해진다. 100만엔이 있으면 그것은 1만엔이 100장 모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처음부터 있는, 무슨 덩어리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것을 누린다.

리카가 이렇게 폭주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가부장적인 남편은 은연 중에 경제적 우월감을 드러낸다. 자신에게 붙어 기생하는 존재였던 아내가 파트 타임 은행원으로 취직해 계약직까지 승진하자 자신이 더는 경제적 주체가 아니라는 현실이 탐탁지 않다. 하지만 12살 연하 내연남 고타는 달랐다. 고타는 엄마를 찾는 아이 같았다. 고타 앞에서 돈을 펑펑 쓰면서 리카는 존재 의미를 찾았다. 누군가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가 됐다는 사실이 기뻤다.



모든 쾌락에는 벽에 부딪히고 싶어 하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공존한다. 이 위험한 폭주가 언젠가는 절벽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라는 것을 리카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돈이 주는 아찔한 평온함을 거부할 수 없었다. 돈이 많으면 세상 사람들이 친절하게 느껴진다. 리카에게 거액을 정기 예금하던 부유한 노인들은 돈이라는 것으로 폭신폭신하게 둘러싸인 세상에 산다. 레스토랑에서도 바에서도 백화점에서도 부티크에서도, 그들을 맞이해주는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 끊이지 않았다. 아주 친절하게, 농담 한두 마디를 섞어서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해주었다. 거기에는 악의도 경멸도 오만불손함도 없고, 그저 포근한 선의만이 있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그들의 삶을 리카도 공유하고 싶었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리카는 횡령범이 되지 않았을까? 은행이 아닌 타운지 편집회사에 취직했더라면, 고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지금쯤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을까? 수 많은 선택지 중 다른 답안을 골랐다 할지라도 리카의 삶이 마냥 평온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곪을 대로 곪은 그녀의 친구들처럼 말이다.

소설의 배경은 90년대 초반. 이야기 흐름은 일본 버블 경제 붕괴 과정을 따라 이동한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부동산 시장에 몰려들었다가 실패하고 돌아선 사람들의 피폐한 모습을 리카의 은행 업무에 투영한다. 점점 쇠락해가는 경기 속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청년들, 사소한 빈부의 격차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여자들의 심리적 갈등이 마치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듯 선연하게 드러난다. 동시에 돈을 향한 탐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소설 제목이 왜 ‘종이달’일까? 옛날 일본 사진관이 성업하던 초기에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걸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종이달’은 연인이나 가족과 보낸 가장 행복했던 때를 비유하는 단어가 됐다. 소설에서 리카의 ‘종이달’은 이제는 가질 수 없는 덧없는 시간,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했던 그때가 아니었을까.


이소영 / 언론인, VA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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