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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로 오렌지 농장 위축…한인촌 인구 감소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15)

리버사이드 지방회 재정적 어려움 커져
신한민보에 회관 폐지 보도까지 게재돼
지방회가 바인 도로로 이주 결정하면서
파차파는 더 이상 한인촌 역할 못하게돼


'신한민보'는 1912년 6월 17일에 "하변동의 사업. 리버사이드에 있는 동포 정동심.조갑석 양 씨는 사업에 착수하여 웨스트 리버사이드에 밭 15에이커를 6년 계약으로 세득하여 1년 감과 딸기 등의 채소 농원을 경영하기로 방금 기구를 준비하는 중이라 하더라"고 보도했다.

'신한민보' 같은 날 다른 기사에서 "하변 동포의 의무금. 춘절을 당하여 각처에서 의무금 보냄이 심히 가득하고 성하더니 리버사이드에 있는 동포들은 신문이 오랫동안 나지 못함을 민망히 알고 의무금을 낱낱이 거두어 보낸 고로 본보가 다시 발간되는데 롬폭 지방 동포들도 이와 같이 의무금을 낱낱이 걷는 중이라 하니 응당 각쳐 동포가 한결같이 마음을 쓸 줄 믿노라"라고 했다.

안창호 가족이 1913년 12월에 LA로 이주한 후에도 1918년 말까지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에서는 왕성한 활동이 계속되었다. 1913년 한파로 리버사이드에서 성업 중이던 오렌지 농장 산업이 큰 타격을 받게 되자 한인 노동자들도 직장을 잃고 많은 한인들이 중가주와 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파차파 캠프 거주 한인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차파 캠프는 한인타운으로서 계속 지속되다가 1918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근처로 이주하면서 쇠락한다. 1917년 9월 6일 '신한민보' 보도에 의하면 "리버사이드 지방회는 8월 29일 제8회 국치 기념을 거행하였는데 재류 동포 전수 30여 명이 출석하여 침통한 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것을 통해 볼 때 그때까지도 30여 명의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활동을 전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7년부터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다. '신한민보'는 1917년 6월 14일에 "회보. 하변지방회"에서 "一. 본 지방회 채무보급의 부족액을 바쳤다. 一. 현금 노동의 시기로 인하여 회원 이거가 빈번하므로 4개월간 휴회하기로 하였다"고 보도했다.

또한 '신한민보' 1918년 2월 14일자 보도에 '하변 지방회의 변명…회관 폐지는 풍설'이라는 제목으로 "하변 지방회관의 유지 곤란은 본 신문 지난 호에 게재한 바 있다. 이제 동 지방회 총무 최재덕 씨의 변명을 보건대 이하와 같더라. '귀 신문 지난 호에 게재한 하변 지방회 사실은 누구의 와전인지 알 수 없거니와 우리 하변 지방회의 열심 있는 회원은 매우 불만족하게 생각하나이다. 이곳은 난리 '오렌지' 흉년을 인하여 사람이 많이 모여 잇지 못하거니와 모여 있는 동포는 실로 국민회에 대하여 열정을 기울이니 소수의 사람으로 지방회관을 이만큼 유지하여 오는 것은 스스로 자랑할 만한 일이올시다. 지나간 몇 년 동안 져 오던 지방회의 빚을 근래에 다 갚았고 국어학교를 계속하며 매주일 모이는 사람은 노소를 아울러 무려 20여 인에 달합니다. 아무런들 역사가 오래된 우리 지방회관을 어찌 폐지하오리까.'하였더라. 본보는 이 통신을 의지하여 지난번 통신을 한 풍설에 돌리고 하변 지방회원의 역사 관념이 건전한 것을 공경하노라"라고 보도했다. 이때는 이미 경제적인 어려움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신한민보'는 1918년 4월 18일 "회보.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4월 4일 통상회를 경유한 사항이 왼쪽과 같다. 一. 국어학교 직원을 왼쪽과 같이 새로 정하였다. 교장 박일우, 교사 최재덕, 재무 정인영. 一. 회관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교회 방을 얻어 쓰기로 하였다"고 보도했는데 지방회 회관과 교회를 통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관이 1532 파차파 애비뉴(Pachappa Avenue)에서 근처에 위치한1158 바인 스트리트(Vine Street)로 이전하면서 파차파 캠프는 한인타운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다.

필자는 파차파 캠프에 거주했던 한인들의 입국 경로를 찾다가 2차 세계 대전 이전 멕시코와 캐나다 국경을 건너 미국으로 입국한 한인들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러나 정확한 경로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물론 멕시코의 유카탄으로 반노예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입국했을 가능성이 많아 명단을 대조해 본 결과 유카탄으로 이주했다가 육로로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입국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엘렌 전이 쓴 기록에서 그 이유를 대략 알 수 있게 되었다. 1921년에 전낙청은 미국의 멕시코 국경 근처의 한 마을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곳의 땅 주인이 그에게 "포도 농사를 지으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했고 그가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전낙청은 당시 한국 학생들이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건너가는 방법을 모색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낙청은 주씨 성의 한 학생이 멕시코의 멕시칼리에서 미국의 칼렉시코로 넘어오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 학생은 국경을 넘자마자 동부로 갔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꽤 유명한 예술인이자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그는 워싱턴 디씨에서 활동하며 불법으로 미국으로 입국한 한국인들에게 합법적 지위가 주어지도록 증언하면서 자신도 전씨의 도움으로 입국한 사실을 밝혔다.

전낙청은 이러한 사실은 자신들의 자녀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씨는 미국으로 망명을 온 것인데 그 학생은 2년 동안 고비를 넘겨 만주에서 러시아를 통해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멕시코를 가는 배를 타고 멕시코에 도착 후 전씨의 도움으로 미국에 입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이전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입국한 한인들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16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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