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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칼럼] 마음을 통역할 수 있다면

가끔 집 근처 대학에서 제공하는 평생교육 과정을 신청해서 듣는다. 생계를 위해서 부득이 들어야 했던 것은 아니고 자기계발을 위해서 나름대로 생각해 낸 고육책이라, 부담감을 느끼기보다는 늘 기쁨이 앞서는 즐거운 일이었다. 다행히도 본능적으로 무엇이든지 활자로 된 것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성정인지라,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은 언제나 느슨해진 내 삶을 팽팽하게 복구시켜주는 활력소가 되고, 녹슨 내 머리에 윤활유가 되기도 했다.

최근 마지막으로 들었던 강좌는 2년 전 의료통역사 준비 과정이었다. 사실, 노인을 대신해서 의사를 만나는 일은 내 직업상 일에 포함되어 있다. 지난 십 수년간 수술이나 입원을 위한 절차나 상담을 환자 대신했던 경험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 실질적인 경험이 있으면서도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그 강좌를 들으려 했던 까닭은, 할머니들의 고통이나 느낌을 의사에게 대신 전할 때 늘 뭔가 모자란듯한 느낌이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어떤 전문적인 방법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신청했지만, 강좌를 듣는 동안 환자나 의사의 표현을 가장 적확한 단어로 명료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 통역사의 가장 올바른 역할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흥미가 잃었다. 게다가 영어 실력도 모자랐던 탓에 나는 결국 시험도 통과하지 못했다.

지난겨울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응급실에 갔었다. 해마다 날씨가 추워지면 어김없이 도지는 숨 가쁜 증상 때문이었다. 응급처치 후에 일반 병실로 옮기라는 의사의 오더에 따라 할머니를 입원시켰다. 의료진과 언어소통이 쉽게 되길 바라면서 한국어 통역 서비스도 신청했다.



이틀이 지난 후, 할머니를 보기 위해 병동에 막 들어섰는데 어디선가 악쓰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귀에 익은 음성, 할머니였다. 깜짝 놀라 간호사에게 까닭을 물으니 어젯밤 내가 다녀간 후부터 계속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잰걸음으로 병실로 들어서는 나를 본 할머니가 한순간에 비명을 딱 그쳤다. 어디가 아파서 그러느냐 물었더니, 집에 가고 싶어서 미친 척하는 중이라고 했다.

처음엔 농담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아니었다. 할머니는 베개 밑에서 꺼낸 종잇조각을 내 손에 쥐여주며 금 조각이니 잘 간직하라는 둥, 병원의 온 벽을 돈으로 발라 놓았으니 마음대로 떼어 쓰라는 둥, 방금 딸이 다녀갔었다는 둥 횡설수설했다.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 큰일을 치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캘리포니아에 사는 할머니 외동딸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니, 천식 때문에 갔던 병원에서 왜 입원까지 시켰냐며 당장에 퇴원시키라는 전화를 의료진에게 당장 하겠노라 했다. 퇴원하면서 병원에서 받아온 약들을 정리하다 보니, 정신과 처방 약이 한 가지 들어 있었다. 퇴원 며칠 후부터 제정신을 찾은 할머니는 예전처럼 웃고 마시고 산책도 하며 지냈다. 전과는 달리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할머니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가끔 그들의 생존력의 근원은 어디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쩌면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할머니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은 대부분 혈연관계다. 곁에 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더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가족들, 가슴 속 빈터를 채우지 못해서 또는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늘 아련한 심정이 되어도, 그리워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내 마음에 한편에 있어 버틸 수 있는 삶. 그래서 그리움은 사람이 가장 오래 지녀야 하는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이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샘 같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 본다. 그렇다면 팔순이 지난 할머니가 두려움에 떨며 병실에서 혼자 목이 터지라고 고함을 치며 미친 척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통역할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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