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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빈손 그리고 벗은 몸

[LA중앙일보] 발행 2019/02/23 미주판 9면 기사입력 2019/02/22 18:15

인간 내면의 욕망과 소유 사이의 공간은 좁디좁다. '비움'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소유와 비움은 상극이다. 서로 외면, 아니 부정한다. 가치의 추가 소유로 쏠리면 비워냄의 의미는 희석된다. 끝없이 욕망을 자극하는 소유는 마치 순식간에 흩어지는 연기와 같아서다. 거기에 함몰되면 삶은 순간 허상이 된다.

소유를 좇는 인간의 맹목은 고질적이다. 소유에 대한 갈망은 금세 욕망으로 변질되고 이는 유한한 삶에서 직접 손으로 쥘 수 있는 실존의 것만 찾게 하는 습성에 젖게 한다. 소유에 대한 도취 그리고 욕망이 잠식해가는 인간의 사고는 서서히 가치 판단의 분별을 마비시킨다. 그 누구도 소유의 관념 앞에서 적당히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이유다. 소유에 대한 추종은 유무형의 요소를 쟁취하기 위한 크고 작은 몸부림으로 발산된다. 그러기에 더더욱 쉽게 제어될 수 없다.

쟁취에 대한 집착은 소유의 개념에 차등을 두게 한다. 무엇을 얻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그릇되게 뿌리 내린다. 심지어 소유의 양에 따라 서열이 나뉘고 그 기준을 토대로 부질없는 높고 낮음이 생성된다. 그렇게 고착된 소유에 대한 인식은 가지면 가질수록 쾌락의 단맛을, 잃으면 잃을수록 열등의 쓴맛을 알게 한다. 이는 인간 본연의 가치와 존재성이 어느 순간 소유의 질량으로 정의되는 폐해를 낳는다.

본래 소유는 역설이다. 달면 달수록 쓰디쓰다. 그 맛에 도취될수록 쾌락과 불안이 비례한다. 쟁취할수록 생겨나는 안도는 가진 것을 내려놓을 때의 두려움으로 직결된다. 이는 처음과 끝, 인생 본디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없이 빈손, 벗은 몸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 걸음은 반드시 멈추게 돼있다. 그땐 모두가 예외없이 빈손, 벗은 몸으로 회귀한다. 인간은 그 순간이 가장 솔직하다. 그래서 본모습을 인식하는 죽음은 누군가에게는 때론 공포다. 소유로 덕지덕지 치장된 허상의 '나' 자신이, 본래의 '나'를 마주해야 하는 궁극의 순간이라 그렇다. 소유하는 것도 어렵지만, 비움은 더 어렵다. 단지 실존의 것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쥐기 위해 발버둥쳤던 시간과 마음마저 모조리 내어버려야만 하는 한탄을 요구해서다. 부귀와 영화 자체는 미운 게 아니다. 인간의 욕망에 따른 갈증이 무서운 거다. 그걸 본질로 여겨 젖어드는 걸 두려워 해야 한다.

욕망은 허망과 상통한다. 유한한 인생에서 무한한 건 없다. 채울수록 공허하고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 그럴수록 소유물이 붙어있는 표층을 벗겨내고 심층, 인간 본연의 실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인간의 본질적 가치는 소유가 아닌 생명이 담긴 '존재' 자체에 있다.

최근 종교면에 수퍼보울 우승컵을 들어올려 봤던 선수(클린트 그리샴·본지 2월12일자 A-27면)의 신앙 고백을 보도했다. 그는 우승만 하면 모든 것이 채워질 줄 알았다. 그 순간을 행복의 궁극으로 여겼다. 그러나 영원한 건 없었다. 심지어 그는 "마치 모든 것이 '사기(fraud)'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삶은 비울 때 자유로워지고 소유할 때 구속된다. 자유와 구속, 무게 추를 어디에 두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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