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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보다 평범한 일상이 아름답다”

고수를 찾아서 <13> 변재성 디자인 리얼리티 대표

변재성 대표는 1억 달러가 넘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주라기공원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지만, 지난해 만든 농심공장 견학관에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운 조형물이라고 했다.

변재성 대표는 1억 달러가 넘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주라기공원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지만, 지난해 만든 농심공장 견학관에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운 조형물이라고 했다.

33년 조형물·세트 제작 전문
주라기공원 테마파크 공룡
꽃차·카지노 등 작품 수천점
예술가 꿈꾼 청춘…오랜 방황
서른 중반에 우울증 극복하고
조형 제작사 거쳐 97년 독립
“노숙자 돕는 삶이 마지막 꿈”


‘예술’은 고상하기 어렵다. 타협하지 못해 고집하다 결국 타협하면 밥벌이가 되고 만다.

변재성(66) 디자인 리얼리티 대표도 평생 예술과 밥벌이 사이에서 떠돌았다. 젖소를 키우고, 돼지갈비집을 하고, 닭을 배달하고, 빌딩청소일에 벼룩시장 상인, 간판 제작을 할 때도 머릿속엔 오로지 예술가만 꿈꿨다.

서른 중반에 삶은 바닥을 쳤다. 대륙횡단을 하다 심한 우울증에 자살만 떠올렸다. 벼랑 끝에서 그가 스스로와 타협한 직업이 ‘조형물·세트 제작전문가’다. 영어로는 ‘시너리 앤 프랍(Scenery & Props)’이라는 일을 33년째 해오고 있다.



타운 마당몰내 본지 가판대

타운 마당몰내 본지 가판대

대표작은 LA관광명소인 유니버설 스튜디오 내 놀이기구 '주라기공원(Jurassic Park)’의 공룡들이다. 또 매년 LA한인타운 올림픽가에서 열리는 한인축제 퍼레이드에 선보인 수백여개의 꽃차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할리우드 영화세트장,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폭포, 각종 엑스포 내 대기업 부스 제작에도 땀을 쏟았다. 말만 하면 누구나 알만한 조형물 수천 점을 30여 년간 만들어왔지만 그를 제작자로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지금까지 ‘고수를 찾아서’ 시리즈에 소개한 13명 중 그와 인터뷰를 가장 오래 했다. 그의 예술 인생은 아프고, 좌절하고 일어서느라 길었다.

#소 세 마리 목장

경기도 안양 근처에서 1953년 전쟁통에 6남매의 막둥이로 태어났다. 귀여움받고 자란 막내는 자유분방했다. 큰형은 극단 단장을 하면서 서영춘(1986년 작고), 구봉서(2016년 작고)씨와 전국에 공연을 다녔다. 그 열정과 끼는 어린 막내에게 예술의 꿈을 심어줬다. 초중고교에 그림대회에서 입상도 곧잘했다. 손재주까지 있어 미대를 꿈꾼 건 자연스러웠다.

부모는 반대했다. 큰형이 겪은 고생길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다. 대학을 못가 실의에 빠져있던 그에게 친구가 젖소를 키워보자 했다. 스무 살 어린 청춘에겐 말보로담배 광고의 멋진 카우보이가 떠올랐다. 낭만적인 목장을 꿈꾸며 소를 세 마리 샀다.

“계획은 거창했죠. 당시 김종필씨 소유의 서산 목장에 소가 600마리 있었는데 우린 601마리를 키워보자고 했죠. 한 2년 고생만 했어요.”

맨땅에 축사 짓고, 소젖 짜는 법부터 배워 소를 10마리까지 늘렸지만, 하루에 몇 차례씩 풀을 베서 소여 물 주는 고된 노동은 낭만적인 목가 풍경이 아니었다. 그만두고 군에 입대했다.

#통나무 간판집

73년 강원도 철원 백골부대 3사단에 배치됐다. 제대가 코앞이던 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북한군의 도끼만행사건이 터졌다. 휴전선 철책 부대에서 말년 병장의 호사는 없었다.

제대 후 ‘목장 친구’와 다시 뭉쳤다. 이번엔 안양역앞에 돼지갈비집을 차렸다. 폼나는 한정식집을 하고 싶었다. 직접 만든 간판이 유명세를 탔다. 통나무를 잘라 나무결 위에 ‘안양갈비’를 쓰고 쇠사슬로 걸었다. 내부 의자, 테이블도 공예품처럼 만들었다. 길목도 좋아 장사가 잘됐다. 피 끓는 20대 사장에게 유혹이 많았다. 가게 문을 닫으면 술 마시러 가기 바빴다. “노는데 빠져 살다가 어느 순간 이렇게 막 살아도 되나 겁이 났어요. 부모님들 걱정도 많으셨고요. 2년 만에 가게를 접었죠."

#도로 위 닭 장사

밤길을 달리고 싶었다. 소 키우면서 알게된 양계장에서 늙은 산란계를 받아 트럭에 싣고 전국 장터를 누볐다. 시골 5일장에서는 육계보다 산란계가 더 인기였다. 알도 낳을 수 있고 육질도 더 쫄깃쫄깃했다. 닭 배달은 밤에만 했다. 30마리씩 구겨넣은 닭장을 층층이 쌓아 수천마리를 한꺼번에 나르다 보니 땡볕에 다니면 폐사하기 일쑤였다.

전라도, 충청도 방방곡곡을 다녔다. 일은 낭만적인 밤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이 트기 전에 도착하려면 쉬지 않고 밟아야 했으니 졸다가 여러 번 큰 사고가 날 뻔했다. 휴게소에서 불량배들을 만나 돈을 뜯기기도 했다. 3년하다가 여자를 만났다. 중매로 만난 아내는 미국 텍사스에 살았다. 하고 싶은 게 또 생겼다. 포기해야 했던 예술 공부였다.

#아메리칸 ‘아트 드림’

84년 서른 한 살에 미국땅을 밟았다. 오자마자 들이닥친 밥벌이의 압박에 그림 공부는커녕 ‘스리잡(three job)’을 뛰어야 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간판 공장에 나가고 저녁엔 자정까지 빌딩을 청소했다. 주말에는 동네 벼룩시장에 나가 가판대를 깔고 선글라스, 귀고리를 팔았다.

“그때 이민온 한인들은 다 그렇게 살았어요.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영어도 못했지만 손짓 발짓하며 일했죠. 힘들게 살면서도 예술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벼룩시장에 장사하면서 이젤을 펴고 그림을 그리곤 했죠."

깨진 환상은 실망으로, 일상의 싫증으로 바뀌었다.

#대륙횡단, LA, 우울증

다시 길을 떠났다. 대륙횡단이었다. 아내의 반대는 당연했지만 그의 방랑은 당당했다. 10년된 중고밴을 사서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조지아, 켄터키, 애리조나를 떠돌았다. 가다가 벼룩시장에 멈춰 물건을 팔면서 호구지책을 했다. 1년 넘도록 길 위에서 보냈다. 흘러흘러 LA에 도착했다. 정착하자, 기회를 꿈꿨다. LA시티칼리지에서 2년간 조각을 공부했다. 작품 공모전에서 여러차례 입상도 했다. 일하던 간판공장에서 ‘퍼레이드 꽃차를 만들어보지 않겠냐’ 제안을 받았다. 87년이었다.

그가 만든 꽃차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홍보차량 장식하러 미국에 왔나 실의에 빠졌다. 이번엔 자기혐오의 늪이 깊었다. 1년 반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일상 생활을 못했어요. 집안에만 처박혀 있다보니 자기연민에 빠지고 ‘차라리 죽자’ 자살 충동도 여러 차례 겪었죠.”

한국에 나가서 치료를 받았고 교회에 다니면서 다시 힘을 얻었다. 앓다가 죽으나 일하다 죽으나 마찬가지니 죽도록 일해보자 용기가 생겼다.

#마흔에 찾은 길

92년 LA폭동 직후 다시 LA로 돌아왔다. 꽃차를 만든 인연으로 ‘렉싱턴(Lexington Scenery & Props)’이라는 회사에 입사했다. 대형 조형물 제작 전문회사였다. 마침 이듬해 한국서 열릴 예정인 대전 엑스포의 삼성우주관을 한창 제작중이었다. 실내 인테리어를 마치 우주선에 앉아 있듯 꾸며야했다. 통역 겸 기술자로 대전 엑스포 현장에 출장도 갔다. 일에 재미가 생기니 욕심도 들었다. 94년엔 실크프린팅 공장을 직접 차렸다. 낮엔 렉싱턴에서 저녁엔 내 사업장에서 밤을 새웠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주라기공원, 식스플래그 우주왕복선, 라스베이거스 호텔, 할리우드 영화세트장, 연극무대 세트 등등 크고 작은 프로젝트 수천건을 제작했다. 꽃차도 줄곧 그의 몫이었다. 97년부터는 독립했다. 지난해엔 농심의 랜초쿠카몽가 공장내 라면견학관을 만들기도 했다. 요즘은 교회 내부 인테리어나 의자 등 성구, 주택 주방 캐비넷 등 가구를 주로 만든다.

#인생 마지막 예술

-삶에 굴곡이 많다.

“예술가의 꿈과 하루 벌이 현실 사이에서 방랑했다. 삶이 고될수록 앞으로 멋진 예술가가 되는 과정이라고 착각했다. 진짜 내 것은 줄곧 내 안에 있었는데 엉뚱한 데서 찾으려고 했다.”

-후회되는 게 있나.

“방황만 하다가 서른 후반에서야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그리고 28년을 해왔으니 천직인 셈이다. 만족한다. 다만 독립해서 회사를 차린 후부터 언어가 편하고 일하기 쉬운 한인 고객만 상대했다. 주류사회 일을 좀 더 했었더라면 아쉬움은 있다.”

-본인이 제작한 최고의 조형물을 꼽는다면.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놀이기구인 ‘주라기공원(Jurassic Park)’이다. 가장 어렵고 긴 시간 작업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렉싱턴 등 20여 개 회사가 참여한 대형 프로젝했다. 94년부터 2년간 매달렸다. (1993년 개봉된 동명의 영화를 주제로 한 주라기공원 놀이기구는 1억1000만 달러를 들여 제작됐고 1996년부터 2018년까지 22년간 유니버설스튜디오의 대표 놀이기구로 인기를 누렸다)”

-어떤 부분에 참여했나.

“출발점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 참여했다. 난제가 많았다. 예를 들면 입구문이 너무 커서 자동 개폐 장치를 설치하기가 까다로웠다. 또 공룡 조형물은 일일이 조각해서 표현해야 했다. 특히 동굴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텍스처와 조명을 신경 써야 했다. 동굴 마지막 부분에 아래로 뚝 떨어지는 스릴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꽃차도 궁금하다. 몇 개나 만든 건가.

“세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는데 수백 개다. 87년부터 지난해까지 32년간 퍼레이드에 나온 거의 대부분의 꽃차를 만들었다. 가장 주문이 많았던 해가 20여대였다. 그러다 점점 줄어들어 지난해 퍼레이드에 나온 꽃차는 1개뿐이었다. 축제 퍼레이드가 예전같지 않아 아쉽다.”

-가장 공을 들인 꽃차는.

“우선 꽃차의 정의를 정확히 해두고 싶다. 한인축제 퍼레이드에 나오는 꽃차는 대부분 꽃으로 만들지 않는다. 스폰서의 테마에 맞춰 반짝이, 조형물을 장식한다. 예를 들어 항공사면 비행기 조형물 같은 식이다. 2007년 심형래씨가 제작한 영화 ‘디 워’를 홍보한 꽃차가 기억에 남는다. 큰 이무기 형상을 꽃차 앞부분에 세웠다.”

-평생 멋진 조형물을 만들어왔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젊을 때는 보기에 좋은 게 아름다웠지만, 지금 돌아보니 평범한 일상이 가장 아름답다. 작년에 랜초쿠카몽가의 농심 공장에 견학관을 지으면서 전시용으로 사람 크기만한 신라면 라면봉지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참 좋아하더라. 있는 그대로를 만들었고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나.”

-추한 것은 뭔가.

“진실에서 멀어질수록 추하다. 가구공장을 크게 하고 싶어서 2년 전에 기계를 구입했다. 계획한 대로 잘 안되니 기계들이 보기 싫어지더라. 기계가 추한 게 아니라 내 욕심 추했다.”

-남은 꿈이 있나.

“요즘 화려한 조형물을 만드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 돕는데 더 만족하고 산다. 지난해 8월부터 매주 수요일 다운타운에서 300명분 음식을 노숙자들에게 대접한다. 3주전엔 내가 다니는 ANC 온누리교회의 교인이 마스크 1000개를 기부해줘서 노숙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은퇴하면 홈리스들을 돕는데 전력하고 싶다.”

▶문의:(323)974-4222 변재성 대표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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