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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에서 부는 바람, 서에서 부는 바람]6.25 전쟁 때 헤어진 두 친구

6.25 전쟁에서 혜어진 잊지 못할 두 친구가 있다.
첫번째는 나보다 나이가 세살 위인 용희라는 친구요, 두번째는 두살 위인 진우라는 친구다.
나는 7살에 국민학교를 입학한 덕분에 같은 학년인 나의 친구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나는 13살 중학교 1학년 때 6.25를 만났다.
6.25전쟁이 70년을 맞이하니 이 친구들과 헤어진지도 어느덧 70년이 된 것이다. 살아있으면 모두 80을 넘긴 노인들이 되었다.

용희는 16세 어린 나이로 1.4후퇴 직전 학생병으로 국군에 입대하여 전투에 가담했으나 그 후 생사를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진우는 형 창우와 함께 9.28 수복 후 자진하여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한으로 갔다. 나는 이때 쯤되면 이 친구들과 함께 보냈던 그때를 반추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몸소 느낀다.

나는 6.25 전쟁을 흑석동 한강에서 용희와 진우 그리고 다른 동네 친구들과 함께 수영을 하다가 만났다. 당시 여름에 우리들이 가장 즐겨찾는 놀이터는 한강이었다.


우리 셋은 이날도 강가 모래에 나란히 누어 미래의 꿈을 나누었다. 용희는 과학자의 꿈을, 진우는 정치가의 꿈을, 나는 대학 교수의 꿈을 서로 나누었다.
그런 가운데 오후 3시쯤 이상한 전투기 한대가 노량진 한강 다리를 지나 우리 위를 지나갔다. 집에 돌아가니 아버지께서 인민군 탱크부대가 새벽 3시 개성 송악산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긴급방송 내용을 알려주셨다.
그 전투기도 이북에서 날아온 인민군 공군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튿날 월요일 아침 학교에 등교했는데 학교 당국은 긴급사태로 휴교했으니 연락이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긴급사태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없었다.

6월 28일 새벽 2시 좀 지나서 ‘쾅’하는 소리와 함께 한강 강가에 있던 우리 집이 흔들렸다. 한강인도교가 끊긴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을 막기위해 국군이 취한 조치였다. 아침에 나가보니 다리가 반토막이 나 있었으며 다리위에는 건너지 못한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 일이 있은지 10일 쯤되어 인민군 탱크 행렬이 흑석동 강변도로를 따라 동작동을 거쳐 과천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피난 갈 기회 조차 없게 되었다.
8월 초 쯤 동사무소에 인민위원회가 들어서게 되고, 동네 학생복 공장에서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이 목요일 저녁에 모이기 시작했다.

나와 용희는 진우를 따라 멋도 모르고 민청 모임에 가끔 참석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민청은 청년들의 모임인데 우리같은 소년들도 초청을 했다.
서울 한 명문대를 다니고 있던 20대 청년이 민청 대표를 맡았다. 중학교 5학년 진우의 형 창우도 간부를 맡고 있었다. 민청 대표는 김일성이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로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인민군을 내려보냈다고 남침의 이유를 설명했다.
대표의 강연이 끝난 후 한 간부로부터 ‘김일성 장군’, ‘빨치산 노래’, ‘북한 애국가’ 등 북한의 노래들을 한 30분 쯤 배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 노래들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의 권고로 민청 모임에 곧 발을 끊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3일 후인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잔여 인민군들이 북으로 후퇴하고 진군한 유에군이 전진, 일부 미군부대가 중앙대 낙양중학 등 학교 교사에 진을 쳤다.

평양이 유엔군에게 합락되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시민들로부터 대환영을 받는 뉴스가 들어왔다. 통일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처럼 보였다.
피난갔던 많은 동네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한강인도교가 파괴됐기 때문에 유엔군이 설치한 부교를 통해서 군인들이 서울을 왕래했다. 민간인은 군당국에서 특별히 발행한 도강증이 있어야 서울을 드나들 수 있었다.
1950년 11월 중공군(중국공산당군)이 압록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이 중공군에게 함락당했다. 우리 여섯식구는 피난짐을 꾸려 이웃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네 앞길 신작로를 메웠다. 이날따라 눈이 펑펑 내렸으며 기온은 영하 20도를 맴도는 극한이었다. 방향을 잦지 못한 우리 가족은 무턱대고 다른 사람들의 뒤를 쫓아갔다.

동작을 거쳐 남태령 고개를 넘어 과천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넘어갔다. 과천 어느 초가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저녁에 도착한 곳이 용인 풍덕이라는 마을이었다.
우리는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풍덕마을 빈집에서 며칠을 지냈다. 동네 집들은 이미 피난을 갔기때문에 거의 비어있었다. 우리는 짚이 잔득 싸인 창고에서 잠을 잤다.
며칠 후 아침 중공군이 동네를 점령했으며 그래서 더 이상 남쪽으로 피난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중공군 점령속에서 1주일을 지내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흑석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어느 회사의 관사자리에 남녀학생을 위한 영등포훈육소가 문을 열었다. 이 훈육소는 이를테면 통합피난학교였다. 피난갔던 학생들이 되돌아 왔으나 영등포지역과 서울시내에있는 학교로 돌아갈 수 없는 중학생들이 임시로 모여 공부했던 장소다.
그래서 훈육소에는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모였다. 나중에 서울 길이 트였을 때 서울시내에 학교를 둔 학생들은 본교로 돌아가고 영등포지역에 학생들도 각기 제 학교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훈육소에서 용희와 진우를 만날 수가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낮 한강 모래에 나란히 누어 미래의 꿈을 나누던 그 친구들 말이다. 그 친구들이 그립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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