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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수] 아시안이 무슨 변호사, 자동차 정비나 배워라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민병수 변호사
<2> 인종차별로 서러운 시절

고교 시절 민병수 변호사가 총영사관 공용차량이었던 닷지(Dodge) 위에서 기념 촬영했다. 아래는 민 변호사(중간)와 장병조 판사(오른쪽)의 모습.     [사진제공 = 민병수 변호사]

고교 시절 민병수 변호사가 총영사관 공용차량이었던 닷지(Dodge) 위에서 기념 촬영했다. 아래는 민 변호사(중간)와 장병조 판사(오른쪽)의 모습. [사진제공 = 민병수 변호사]

케네스 장(한국명 병조).

케네스 장(한국명 병조).

민병수 변호사(87)는 LA한인사회의 초대 영사로 부임한 고 민희식(1948년 10월~1960년 8월) 총영사의 둘째 아들로 지금까지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했다. 지난 1회는 경기중 3학년 시절 가족과 함께 고국을 떠나야했던 이야기가 실렸다.

7층짜리 반도호텔 보다가
오색찬란 SF 야경에 감탄
자유로운 교정 너무 행복


배에서 나온 음식은 화려했다. 조반에, 스프타임, 티타임까지 하루에 6~7번의 음식이 제공됐다. 스테이크 등 고기 요리도 넘쳤다.

엄마와 누나(한국명 병순), 여동생(병연)은 멀미로 고생했지만, 아버지와 형(병화), 남동생(병유), 민 변호사는 뱃멀미 없이 식사시간이 되면 열심히 먹었다. 좋은 음식도 며칠뿐. 점차 한국 음식이 그리워졌고 배에서의 생활도 지쳐갔다.



그렇게 2주를 보내고 12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바라본 도시는 아름답고 황홀했다. 가장 놀란 건 거리의 자동차들이다. 게다가 오색찬란한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진 거리 곳곳의 상점들은 크리스마스트리와 각종 장식으로 잔뜩 꾸며져 있었다. 마치 동화 속 마을처럼 보였다.

민 변호사는 “그때만 해도 한국은 거리에 자동차가 하루 한두 대 지나갈까 말까였다. 게다가 가장 높은 건물은 서울에 있는 7층짜리 반도호텔이었다”며 “샌프란시스코 거리에 넘치는 자동차들과 골든스테이트 브리지의 장엄한 모습에 압도당했다”고 당시 받았던 문화적 충격을 설명했다.

폴리텍 고교에 편입

민 변호사는 폴리텍고등학교 10학년으로 편입했다. 당시에도 우수 고등학교로 꼽혔던 폴리텍은 지금은 패서디나에 있지만 그때는 LA다운타운인 워싱턴과 플라워 코너 건물에 있었다.

한국과 달리 자유로운 수업 풍경과 학생들의 생활이 부러웠다.

민 변호사는 “당시 한국 고등학교는 군대식 교육이었다. 소위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그런 교육을 받다가 미국의 학교에 가니 머리도, 옷도 자유롭고 운동장에 줄을 서지도 않았다”며 “자유롭게 공부하는 문화 속에서 공부한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고 말했다.

낭만적인 황홀감도 잠시. 영어와의 힘든 싸움이 시작됐다. 지금처럼 이민자를 위한 영어학습과정(ESL)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기에 매일 몸으로 부딪혀 배워야 했다. 민 변호사는 “아버지는 어릴 때 유학했기 때문에 영어가 유창했지만 자녀들은 전혀 몰랐다”며 “그나마 학교에서 점수를 잘 받은 과목은 수학과 물리 과목 정도였던 것 같다”고 공부의 어려움을 전했다.

배심원 앞 변론을 꿈꿨다

인종차별도 겪었다. 쳐다보지도 않는 백인 학생들과는 아예 친구 되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교사들로부터 받는 차별은 그의 자존심에 적지 않은 상처를 줬다.

민 변호사는 “한국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변호사의 꿈을 키웠다. 미국의 배심원 제도에 대한 책을 읽고 막연히 배심원들 앞에서 피고인을 위해 싸우고 치열하게 변론을 하고 싶다는 꿈을 꿨다”고 했다. 하지만 부족한 영어 실력은 둘째치고, 대학 진학 카운슬러는 상담시간에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밝히자 “그것도 좋지만 자동차 정비를 하면 취업을 잘할 수 있다”는 말로 그의 꿈을 단번에 꺾었다.

미국 오기 전까지만 해도 경기중학교에 재학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던 영민한 그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계속됐다. 한국에서는 친구도 많고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조금씩 말수가 줄었고 조용하게 변했다. 우울한 고교 시절을 보낸 그는 변호사 꿈을 잠시 접고 포모나 인근 라번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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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후반 한인사회는

폴리텍고등학교는 아시안 학생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도 같이 학교에 다녔던 한인 학생이 있다. 바로 케네스 장(한국명 병조·1982년 작고) 판사.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온 장 변호사는 폴리텍에서 1년을 다녔다. 샌타클라라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면서 남가주 첫 한인 변호사로 이름을 남긴다. 이후 장 판사는 민 변호사와 함께 한미변호사협회(KABA)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이 됐다.

장 판사는 1980년 한국인 1세로는 몬터레이카운티 수피리어법원에 근무한 백학준 판사(2016년 작고)에 이어 두 번째로 가주 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됐다. 남가주에서는 첫 한인 판사였다.

당시 그를 임명한 주지사는 젊은 시절의 제리 브라운이다. 지방법원 판사의 자격은 10년 이상 검사로 재직했거나 개업 변호사의 경력이 있어야 했는데 고 장 판사는 1968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고문 변호사로 미국 정부를 위해 주한미군 처우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한국 정부와 협상하고 초안한 경력, 샌타클라라카운티 검사 경력, 개인 변호사 경력 등이 고려돼 임명됐다.

민 변호사는 “제리 브라운 주지사는 이미 한인 커뮤니티가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지사 취임 직후에는 한인 커뮤니티를 찾아 주요 인물들과 만나 의견을 들었고 한인 판사로 장 판사를 지명했다”고 들려줬다. 안타깝게도 장 판사는 임명된 후 얼마되지 않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민 변호사의 또 다른 기억은 아시안에 대한 차별이다. 미국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해 두 번이나 금메달을 차지한 다이빙선수 새미 리 박사도 이를 피하지 못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오렌지카운티 쪽에 집을 사려고 했던 새미 리 박사는 주민들의 반대로 집을 살 수 없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닉슨이 우연한 기회에 이 사실을 알고 지역 주민들을 설득했다. 민 변호사는 “닉슨이 오렌지카운티 출신이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금메달을 두 번씩이나 미국에 안겨준 새미 리 박사도 이랬으니 일반 사람들은 어땠는지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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