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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홍](6) 파산 직전 은행…나만의 경영 맘껏 펼쳤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한인은행의 '처음' 벤자민 홍

<6>나라은행에 구원투수로 돌아오다

나라은행의 이사들 모습. 왼쪽부터 벤자민 홍 행장, 고 브라이언 우·고 김용환 이사와 김창희·박현만 이사. 앞줄 가운데는 토마스 정 이사장.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나라은행의 이사들 모습. 왼쪽부터 벤자민 홍 행장, 고 브라이언 우·고 김용환 이사와 김창희·박현만 이사. 앞줄 가운데는 토마스 정 이사장.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나라은행은 중앙은행과 2011년 12월 합병하면서 현재 뱅크오브호프의 전신인 BBCN으로 탄생하게 됐다. 나라은행의 로고와 본사가 있던 월셔 콜로네이드 건물의 전경.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나라은행은 중앙은행과 2011년 12월 합병하면서 현재 뱅크오브호프의 전신인 BBCN으로 탄생하게 됐다. 나라은행의 로고와 본사가 있던 월셔 콜로네이드 건물의 전경.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벼랑 끝에서 소액 투자가 만으로 200만불 증자
성과급 확산에 직원들 의욕 불타며 성장 가도


1996년 3분기 나라은행의 대출고는 6690만 달러로 직전 분기 대비 13.1% 증가했다. 이는 당시 한인은행들 중 가장 큰 폭이었다. 1996년의 순익도 가파르게 성장했다. 전년보다 75%나 급증한 것. 벤자민 홍 행장이 다 쓰러져가던 나라를 이끈 지 2년 만이다.

나라은행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그는 사실 잠시 인생의 쉼표를 찍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구원투수로 등판해달라는 요청을 너무 일찍 받았다.

한미은행과의 연을 뒤로한 지 5개월이 지난 즈음에 나라은행 이사들로부터 교섭이 들어왔다. 당시 나라은행은 파산 일보 직전이었다. 은행 감독국의 제재(C&D)에다 자본 규모도 100여만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그들에겐 구세주가 필요했다.



이사 일부가 나라은행에 와달라며 통사정을 했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홍 행장은 “한미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거절했지만 이사들은 대안이 없다고 계속 설득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힘을 합쳐서 살려고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나라은행 이사회와 경영진은 서로 반목하고 내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가 극구 사양한 이유다. 이런 연유로 그는 훗날 은행의 경영과 소유를 확실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소신을 관철하기에 이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감독국은 은행 증자가 안 될 경우 은행 문을 닫게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라은행 이사들은 홍 행장만이 증자를 성공적으로 이끈 은행의 구세주라며 부탁을 했다. 그도 한미은행에서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던 터라 한 번 더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이 소식이 한인 은행권에 퍼졌다. 창피하게 왜 망하기 일보 직전인 은행의 행장으로 가느냐고 만류한 한미은행 직원도 있었다. 반면 그를 따라 은행을 옮기겠다고 나선 이도 있다고 한다. 현재 오픈뱅크를 이끌고 있는 민 김 행장도 탄탄한 성장 가도를 달리던 한미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나라로 당장 달려온 인물이다.

▶15만불이 된 1000불 촌지

우여곡절 끝에 나라은행으로 1994년 7월 그는 출근하게 됐다. 직접 마주한 은행의 재정상태와 은행 인력 상황은 더 심각했다. 정말 답이 있을까 하는 정도로 앞이 캄캄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그의 도전정신을 다시금 불러냈다.

“처음엔 막막했습니다. 은행 상황은 완전 백지상태였습니다. 은행이 이 지경까지 됐을까 할 정도로 말입니다. 기가 막혔지만, 긍정적인 눈으로 다시 보니 텅 비어 있는 흰 도화지에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당장 필요한 돈을 구하고 리더십과 인력만 갖추면 한미를 따라잡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습니다.”

그런 확신을 바탕으로 홍 행장은 급선무였던 자본금 확충에 나섰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한인 재력가들은 문 닫을지도 모르는 나라은행 증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결국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공모뿐이었다.

“반신반의했습니다. 망해가는 은행에 누가 돈을 투자하겠습니까? 그래도 포기하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심정으로 한인 미디어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1200달러로 나라은행의 주인이 되어주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로 공모 캠페인을 펼쳤다. 1200달러면 400주를 매입해서 나라은행의 주주가 될 수 있었다. 결과는 그도 놀랄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순식간에 200만 달러 증자를 달성한 것.

투자자 중에는 한미은행 당시 촌지 1000달러 거절로 연을 맺었던 건설업체 사장<12월 3일자 미주 6면>도 있었다.

“1200달러를 공모하는데 160배가 넘는 돈을 투자하겠다며 찾아왔습니다. 20만 달러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 사장은 홍 행장이면 믿을 수 있다면서…. 전액 투자하겠다는 걸 겨우 말려서 15만 달러만 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공모자 중 가장 큰 액수였습니다.”

거절했던 돈 봉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기에 150배로 불어서 돌아온 것이다.

수년 전 촌지에 눈이 멀어 그 고객을 진정성 있게 설득하지 않았다면 이런 좋은 결과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밝혔다. 그 건설업체 사장은 물론 한미은행에 투자해서 짭짤하게 이익을 얻었던 투자자와 4·29 폭동 때 도움을 받았던 업주들까지 수백명의 개미 투자자 덕분에 나라은행이 살 수 있는 길이 트였다고 그는 강조했다.

취임하던 첫해에 2차례의 증자를 실시했고 600여 명의 투자가를 규합해서 총 650만 달러를 모았다. 이 공모를 통해 한인은행권은 소액투자가들의 힘만으로도 은행을 회생시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두둑한 보상, 주인의식 일깨워

행장급이나 돼야만 보너스 조건이 있었던 시절에 홍 행장은 전무급과 수익창출과 같은 중요 업무를 담당한 부행장급으로 이를 확대했다. 그의 고용계약서에 일부 직원들의 상여 조건을 포함한 것이다.

지금도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상여 조건이란 이익공유와 성과급이었다. 수익에 대한 배당을 보장하는 ‘직원 주주제’형식을 한인은행 중 가장 먼저 1997년에 시행했다.

“일방적으로 애사심을 강요하는 건 능률 저하만 불러올 뿐”이라고 지적한 홍 행장은 “현재 몸담은 직장이 땀 흘린 대가를 확실하게 보상해주는 등 장래를 약속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젊은 직원들에게 열심히 일하겠다는 동기를 유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확실한 보상체계 덕에 직원들의 근로의욕은 탱천했다. 이게 바로 나라은행이 빠른 성장의 원동력이었다는 설명이다. 일을 열심히 해 은행의 수익을 내면 본인의 주머니도 두둑해지니 당연한 결과다.

진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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