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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홍](7) 한인은행 최초 상장…인수합병 모델도 제시

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한인은행의 '처음' 벤자민 홍

성공은 빛났지만 그림자도 길었다

벤자민 홍 행장은 나라은행 시절 한국의 외환은행과 제일은행의 뉴욕 지점을 인수했고 북가주의 한인은행 아시아은행과 인수·합병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홍 행장(오른쪽 2번째)이 2000년 한국 제일은행 뉴욕지점 인수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벤자민 홍 행장은 나라은행 시절 한국의 외환은행과 제일은행의 뉴욕 지점을 인수했고 북가주의 한인은행 아시아은행과 인수·합병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홍 행장(오른쪽 2번째)이 2000년 한국 제일은행 뉴욕지점 인수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홍 행장(가운데)이 한인은행 최초로 나스닥에 나라은행을 상장한 후 증권 업체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홍 행장(가운데)이 한인은행 최초로 나스닥에 나라은행을 상장한 후 증권 업체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벤자민 홍 전 행장 제공]

이사회와 경영권 갈등으로 '나라' 떠나
새한행장 끝으로 은퇴, 한국에서 활동


1998년 1월 29일은 벤자민 홍 전 행장의 은행가 경력에서 최고의 날이다. 벼랑 끝에 있던 나라은행을 나스닥 상장은행으로 환골탈태시킨 날이니 감격할 만도 하다. 그것도 한인은행 최초로.

나라은행 행장 취임 후 4년 만에 그의 꿈을 이룰 것이라는 건 생각도 못 했다. 티커(ticker)명 ‘NARA’로 정식 투자 종목으로서 거래가 시작됐다. 나스닥 상장이 주는 혜택은 은행 인지도 상승과 원활한 자본 유입이다.

나라은행의 전신인 미주은행의 1989년 주식 발행가격은 주당 10달러였다. 1994년 폐쇄 위기에 직면했을 땐 2~3달러로 폭락했다. 상장 직전 1997년 11월 공모가는 주당 7달러였다. 나스닥 상장 후 6개월 만인 1998년 7월경에는 12.75달러까지 대폭 올랐다. 희석된 후의 주식 가치를 고려하면 나라은행의 몸값은 어마어마하게 뛴 것이다.



상장 은행이라는 이름값 덕에 주가는 급등하고 1998년 예금고는 전년 대비 58%까지 증가했다. 자본이 넉넉해지자 그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렸다.

▶‘M&A’라는 그림

그가 구상한 그림 중 하나는 바로 다른 은행과의 인수합병(M&A)이었다. 1998년 10월 한국 외환은행의 뉴욕 플러싱 지점을 인수했다. 2000년 2월에는 한국 제일은행 뉴욕지점을 사들였다.

당시에도 이사회는 은행 인수를 탐탁지 않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은행들도 한인은행에 넘겨주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한국은행의 위상이 더 큰데 굳이 자그마한 한인은행에 팔아야 하냐는 게 이유였다.

홍 행장은 양쪽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이사회에는 “뉴욕 진출의 발판이라는 명목상 이유와 한인은행의 한국계 은행 인수라는 상징성이 주는 이득을 내세웠다”고 기억했다.

한국으로 날아가 인수 대상 은행의 고위 인사들과 접촉해 굳이 비한인 은행에 넘겨줄 바엔 한인에게 매각하는 게 좋지 않으냐는 거듭된 설득 끝에 겨우겨우 인수를 매듭지었다 .

탄력을 받아 2003년 8월에는 북가주 한인은행인 아시아나은행과의 M&A를 성공시켰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나은행의 홍승훈 행장이 합병은행의 행장직을, 본인은 이사회에 남기로 했다. 재임 9년 동안 은행의 자산 규모는 5000만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20배나 커졌다. 죽음의 문턱에 있던 은행을 한인사회 두번째 규모의 은행으로 비상시켜 다시 한번 구원투수의 진면모를 드러냈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이사’

그의 이사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2003년 9월에 취임했던 홍승훈 행장이 3개월 만에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돌연 사임했다. 당시 이사장이었던 홍 전 행장은 임시 행장직을 맡았다. 2005년 2월 양호 행장이 취임하면서 이사직만 유지한 채 경영에서는 손을 뗐다. 그러다 이사들과의 갈등으로 그는 은행을 떠났다. 얼마되지 않아 나라은행은 홍 행장이 2002 회계연도 회계 부정에 연루됐다며 손배소를 제기했다. 홍 행장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나라은행이 고공행진하자 제 연봉도 당연히 크게 늘었습니다. 이사들의 불만 역시 커졌습니다. 행장의 고액 연봉을 빌미로 잡은 건 형식적인 구실에 불과했습니다. 정작 불만은 기득권 의식이 강한 이사들을 은행 경영에 간섭하지 못하게 한 점에 있었습니다. 이사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한 번은 보너스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75만 달러 정도. 당시 이사장은 미안해하면서 추후 컨설팅 비용으로 보전하는 방안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깔끔하게 포기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라은행은 이를 트집 잡아 법정 다툼을 진행했고 이는 2007년 고용중재재판소가 홍 행장의 손을 들어주며 일단락됐다. 그에 의하면, 포기한 보너스를 제외하고 홍 행장의 변호사 비용을 나라뱅콥이 부담하라고 판결했다고.

홍 행장의 변호인은 이를 근거로 명예훼손 혐의로 손배소를 제기하자고 했지만, 나라와의 인연을 생각해 거절했다.

“억울해서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다시 하려다 옛정에 꾹꾹 참았습니다. 나라가 20만 달러를 벤자민홍재단에 기부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엄청난 배신감은 느꼈지만 ….”

▶잘못된 선택 ‘새한’

2006년 1월 한인은행과의 연을 끊으려 했던 홍 행장은 다시 구원투수로 새한은행 행장에 추대됐다. 그는 행장 대신 고문 자리를 역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새한 이사회가 홍 행장 영입을 두고 물러서지 않았고 딱한 사정에 동의했다.

일각에선 그의 새한은행장 수락을 두고 그로 인해 새한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다른 일부는 새한의 부실 상태가 회복 불가였다고도 한다. 이런 논란에 대해 후자라는 게 그의 입장이다.

“그때 나이가 73세였습니다. 5등 은행의 실적을 챙기고 부실대출을 해결하고 강성 이사회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행장 자리가 주는 무게감이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그만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증훈 전 한미은행장을 (내가) 교섭하고 이사회에 소개했습니다. 은행을 잘 이끌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홍 행장은 리먼 브러더스 발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8년 9월경 행장직을 그렇게 내려놨다.

▶한국에서 찾은 인생 반쪽

3년 동안 한인가정상담소 고문으로 비영리단체를 도왔고 한국 여행등을 하며 지친 심신을 달랬다. 그러다 그는 돌연 한국행을 결심한다.

2011년 한국 부산에서 열린 세계한상대회에서 글로벌 코리언 금융 네트워크 구축 부문 강사로 나서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때 한국의 지식인들과 많은 대화를 했는데 그들의 지식에 공백이 보였습니다. 이론에는 해박했지만, 미국 사회와 금융 시장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도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내가 ‘미국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나눌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2012년 79세의 나이에 한국에 간 홍 행장은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지금의 반려자를 만나 미국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


진성철 기자 jin.sungch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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