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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칼럼] 너무 조용한 '안중근 서거 100주년'

장병희/피플부 데스크

시간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장소는 하얼빈역.

32세의 안중근이라는 청년이 지폐 얼굴 모델일 정도로 일본에게는 위인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간과 장소다.

이날 현장에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라는 러시아어를 외치고 여섯발을 쏜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실질적인 식민통치자인 통감을 쓰러뜨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학교 다닐때 익히 들었던 내용이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의 거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바다.



하지만 2001년 장동건이 주연했던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SF영화를 보기 전에는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소설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원작인 이 작품은 소설이 가상 역사소설에 머문 것에 비해 SF라는 분야로 개작하여 영화화한 작품이다.

장동건의 매력도 1000만 관객을 넘는 흥행도(200만) 안중근을 제대로 조명하지도 못해서 그저 그런 영화에 그쳤다지만 하얼빈역의 현장을 재현하여 그 저격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도 알게 했다.

그럼 이토 히로부미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조선에 대해 온건했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평가다.

실제로 그는 조선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그의 '동양 각국은 서로 힘을 합쳐서 서양세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라는 주장은 그를 쏜 안중근은 물론 조선의 상당수 지식인들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후 초대 조선통감이 되면서 사실상 식민작업을 주도했다. 수만의 조선 민중을 사살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의 호의는 지지 않을 정도로 기만술이 대단했다고 알려졌다. 오죽하면 일부 조선의 신문에서는 논설을 통해서 '동양의 평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선각자를 쏴죽인 테러다'라며 안중근을 비난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제거로 일본내 온건세력은 무너지고 무단통치가 이뤄졌다고 한다. 덕분에 민족 독립쟁취.자각운동인 3.1운동이 가능했다. 히로부미가 죽지 않았다면 고도의 술수로 3.1운동후에 펼쳐진 문화통치류의 지배로 한민족은 민족혼도 없는 일본제국의 2등 국민으로 전락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역사는 안중근의 의거를 통해 한민족을 버리지 않았고 끊임없는 독립 운동덕에 2차대전 종전후 광복을 이뤘다.

그리고 올해 바로 20일 후면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이 된다.

4대 강국이 둘러싼 요즘 한반도의 국제정세가 100년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그래서 더욱 미주 한인들은 안중근이 될 수 없을지언정 우리 2세들에게 안중근 의사의 희생과 조국에 대한 사랑 정도는 가르쳐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단한 명사의 강연회는 아니더라도 영어 자막이 있는 '도마 안중근'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정도는 상영하는 행사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LA문화원이면 어떻고 상업 영화를 상영하는 일반 극장인들 무슨 상관있겠는가.

만약 한반도에 중요하고 역사적인 상황을 만난 미주 한인 2세 어느 누군가가 안중근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얼마나 극적이겠는가.

설마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일제의 문화통치로 자기 이름을 잃고 문화도 말살당하며 살았을때도 미주 한인들의 이민 선조들은 광복군에 합류하여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기에 한민족은 종전후 떳떳하게 광복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국 땅에 살았지만 역사에 길이 남은 100년전의 안중근을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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