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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안중근 의사와 가톨릭

어영엽/신부

지난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중근 의사는 항일 독립투쟁의 대명사와 같은 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안중근 의사 하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만 생각하기 쉽다.

안 의사는 평화주의자였고 고귀한 사상가이며 철학자 그리고 철저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는 민족자존과 국권 수호 정의 실현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생명까지 아낌없이 바친 애국자였다.

안 의사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세계의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제국주의적인 팽창을 시도하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았다. 그는 동양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고민하고 모색했다. 이러한 안 의사의 고민과 노력은 비록 미완성이지만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 평화론'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가 아시아를 하나의 공동체로 본 점과 진정한 평화는 공동의 가치 발견과 공동선의 추구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시아의 공동화폐 발행과 아시아 개발은행 설립을 역설했던 그의 혜안과 통찰력이 놀라울 뿐이다.



안 의사는 인권운동가였다. 정의구현 활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그는 강연 때마다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고 인권과 사회 정의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부당하게 인권을 침해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면서 그들의 권익을 찾아주려고 활동했다.

안 의사는 휴머니스트였다. 언제나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의병활동을 할 때 독립군 부대의 위치와 전력 노출을 무릅쓰고 일본인 포로들을 석방했다. 그분의 고매한 인격 때문에 의거 후 감옥의 일본 관리들도 그를 깊이 존경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철저한 신앙인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일생은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의거도 신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한다. 안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후 맨 먼저 한 일은 기도였고 사형당하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 기도를 바쳤다.

그는 1897년 빌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동안 그의 복사(服事 사제의 미사 집전을 보조하는 사람)를 하며 주변 지역에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의거 후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성 금요일에 사형받기를 자청했으나 거절됐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천주교 안에서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는 소극적이었다. 그분의 의거가 '살인은 불가하다'는 가톨릭 교리와 상치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안 의사가 신앙인으로서 다시 조명을 받은 것은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을 통해서다.

김 추기경은 "일제치하 교회가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연대 책임을 느낀다"며 "대한제국 말기에 일제의 무력 침략 앞에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땅의 국민들이 자구책으로 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로 의거로 보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과거 교회 역사의 잘못을 시인하고 바로잡은 셈이다.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이 그분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이 많은 국민들에게 계승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특별히 많은 청소년들이 안 의사처럼 개인의 안위를 넘어 나라와 민족 세계 평화 등 원대한 꿈을 갖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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