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Los Angeles

55.0°

2020.12.01(Tue)

창간 특별 인터뷰 Ⅰ- 1979년 시카고중앙일보 창간 홍두영 초대 사장

노재원
노재원 기자
  • 글꼴 확대하기
  • 글꼴 축소하기

[시카고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9/21 16:14

신앙과 아내의 힘으로 이겨온 이민 50여년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
어머님 말씀 삶의 철학으로 실천

1942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난 홍두영 장로는 1967년 9월 15일 미국행 비자를 받고 그 이듬해 2월 단돈 200달러를 들고 테네시 주 윌리암 칼리지로 유학을 왔다. 그 당시 한국에서 온 가난한 유학생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학비 마련을 위해 학업과 일을 병행해야 했고 일자리를 찾아 시카고로 이주하게 됐다. 몇 달 후 약혼자인 아내(홍양식)가 한국에서 와서 6월22일 결혼식을 올렸다. 시카고 루즈벨트 대학으로 옮겨 3년간 회계학 공부를 하던 그는 학업보다 비즈니스에 더 관심이 많았다.

우연한 인연으로 현재의 조선옥 자리에서 Jim’s Grill이라는 미국 식당을 하던 부부를 알게 됐고 1971년 식당을 인계 받아 한인 최초로 미국 식당의 주인이 됐다. 1년 반만에 다른 한인에게 넘기고 그보다 더 큰 비즈니스인 클락과 그레이스 길에 있던 맛나당이라는 한국 식품점을 인수해서 운영했는데 잘 됐다. 아리랑, 동아, 그리고 고려식품 등 3곳의 한인 식품점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아리랑 식품은 독일 광부 출신들이, 동아 식품은 유학생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그 당시 그는 클락길 일대에 빌딩 4개를 소유할 만큼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한인회관 건립위원회 실행이사, 총무로서 심기영 한인회장과 함께 모금 활동을 펼쳐 현재의 한인회관을 마련하는 기초를 세웠다.

그는 1977년 말, 윤전시설을 갖추고 중앙일보 현지판을 낼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던 본사에 의해 지역 한인 6명과 경쟁 끝에 시카고 중앙일보 발행 자격을 갖게 됐다. “기사 한 줄도 쓸 줄 몰랐고 책 읽기도 좋아하지 않았는데…(웃음).”당시 한 신문에 보도된 디트로이트 지역 한인 목사님 스캔들 사건을 계기로 지역 목회자들이 재력과 인품을 갖춘 그에게 신문 발행을 권유한 것도 하나의 계기가 됐다.

어빙파크 소재 한인회가 사용하던 건물을 심기영씨로부터 구입하고 적지 않은 금액을 투자, 자체 윤전기 시설까지 갖췄다. 그리고 편집 담당 허영진 목사, 공무 담당 권수길 장로, 보도 담당 김영진씨 등과 함께 1년 반의 준비 끝에 1979년 6월 12일 현지판 시카고 중앙일보를 내놓았다. 하루가 다르게 신문 부수가 증가하고 경영 상태도 호전되어 가던 1980년 9월 우여곡절 끝에 그는 시카고 중앙일보를 본사에 다시 넘겨야 했다.
그 후 1980년 9월 남부 63가에서 여성 옷가게를 하면서 1980년 말 스코키에 닫혀있던 도넛 가게를 인수, 새로 오픈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만큼 번창했고 쉐리단과 어빙파크가 만나는 전철역 밑에 두번째 가게 “A1 도넛”을 열었다. 도넛은 오전 비즈니스라 점심시간을 이용, 샌드위치를 팔기 위해 스코키 시에 요청, 두 차례의 공청회 끝에 허가를 받아냈다. 도넛 가게서 샌드위치까지 팔게 되면서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이어 1994년 오천년 김치와 1998년 식당용 자재용품 업체를 차례로 설립했는데, 하는 사업마다 결과가 좋았다. 2000년에는 미국내 한국 식품 전문업체의 하나인 진한식품 시카고점을 인수, 연매출 1000만달러를 돌파하기도 했다.

2005년 건강으로 인해 일찍 은퇴하고 부동산 개발업에 투자했는데 2008년 불거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개발 중이던 대형 콘도와 쇼핑 센터 분양이 차질을 빚는 바람에 적지 않은 손실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다행히 ‘먹고 살만큼은’경제력이 버텨주었다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1970~1980년대 가족들이 차례로 시카고로 이민, 어느새 일가가 50여명이 됐다는 홍 장로는 비즈니스에 굴곡은 있었지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 위해 비즈니스에 뛰어 들었다는 그는, 함께 유학 왔던 친구들이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 학계 등에서 이름을 높였지만 스스로의 삶에 아쉬움은 없다고 말했다.

비즈니스 성공 비결에 대해 그는 스몰 비즈니스는 주인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직접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직원들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다. 진한식품 운영 당시 홍 장로는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지방으로 가는 트럭들의 뒤를 한동안 따라 가면서 무사히 다녀오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홍 장로 부부는 슬하에 남매를 뒀다. 맏이인 딸 은준(Hellen)은 시카고대학과 일리노이대 약대를 졸업하고 U.S. Public Health Commission Corps에서 20년간 재직 중이고, 기업인수 합병 및 Hedge Fund 분야를 두루 거친 아들 선학(Augustin)은 일리노이대학 어바나 샴페인(비즈니스) 졸업 후 뉴욕 Citi Group 산하 솔로몬 브라더스에서 8년간 M&A로 일한 후 지금은 샌프란시스코 실리콘 밸리 소재 Nutanix라는 IT회사 시니어 디렉터로 근무하고 있다. 부인 홍양식 권사는 1969년부터 Boise Cascade Company에서 1년간, 그리고 1970년부터 현 BP(옛날 이름 Standard Oil, Amoco) Human Resource Depart에서 32년간 일하다 은퇴했다.

그는 사장이나 회장, 대표보다 장로로 불리길 원한다. 한 때 빌딩만 7개를 소유했고 여러 업종의 비즈니스를 탄탄하게 일궜지만 지금도 ‘홍두영 장로’로 불리는 이유다.

여느 이민자처럼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은 홍 장로를 지탱한 것은 신앙과 부인이다. 50여년을 함께 한 부인은 남편이 비즈니스를 하면서 수많은 굴곡을 겪어도 얼굴 한 번 붉힌 적이 없다. 남편의 건강을 허락해주신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곤 했다.

부부는 고난에 처할 때마다 손잡고 “주님이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라는 찬송을 함께 부르며 이겨냈다고 한다. 시카고에 한인 동포가 700~800명, 교회가 6곳이 있을 때 이민 왔다는 홍 장로는 33년째 벨엘교회에 출석 중이다.

2004년 심장 수술에 이어 2008년과 2019년에도 큰 수술을 받은 홍 장로는 한때 많았던 재산을 적잖게 잃기도 했지만 잃어버린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받은 은혜를 헤어리며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1998년 시카고 장로성가단 창단 멤버로 합류, 20년간 단장을 맡았던 그는 “사실 노래를 잘 하지 못해 교회 성가대도 못해 봤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도 읊는다는데 악보도 제대로 모르고…”라며 웃었다.

앞으로 하시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홍 장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행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는 어머님의 말씀을 삶의 철학 삶아 살아온 홍 장로의 얼굴에는 선한 삶을 실천하는 이들에게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늘 배어 있다.

오늘의 핫이슈

PlusNews

포토 뉴스

전문가 칼럼전문가 전체보기

조앤 박 재정전문가

조앤 박 재정전문가

HelloKT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