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사는 이야기] 미국 트럭커의 사는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 - 트럭 면허 취득을 위하여 LA로
자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도 잠시, 워낙 긴장감에 피곤함이 몰려와 한구석에 차를 세워놓고 행여 하는 두려움에 차문을 확인하고 새우잠을 청했다. 잠시 누운 것 같은데 눈을 뜨니 먼동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엔 세수와 양치질은 사치였다. 다시 길을 떠났다. 장거리 트럭 일을 하기 전, 미리 경험한 ‘집 떠나 차에서 잠’을 잔 첫경험이었다. LA에 다다르니 다시 저녁이 되었다. 영어 공포증에 종일 굶고 온 터라 한글로 쓰여진 식당 이름이 왜 그리도 반갑던지 무작정 한국식당에 들어가 이틀 굶은 배를 채웠다. 배가 부르니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고, 한글 간판이 많으니 안도의 숨도 쉴 수가 있었다. 오면서 지인과 약속을 하고 저녁 8시경 한국 마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늦어진다는 연락이 왔다. 영어 없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같은 민족이 오고 가니 늦어도 걱정없다고 했다. 열 시가 넘어도 지인은 오지 않고 마트도 문을 닫는다. 옆구리에 총을 찬 SECURITY가 슬금슬금 내 옆을 맴돈다. 주차장에 차도 거의 빠져나가고 마트도 쇠창살 문을 잠근다. SECURITY가 다시 한 번 내 옆을 스치며 나를 유심히 본다. 조금 전까지 그리 북적이던 거리가 약속이나 한 듯 한가해진다. 생각지도 않던 두려움이 몰려온다. 밤 열 시면 한국 같으면 이제 시작인데 여긴 고요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연속극에서 보던 호화로움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도시, 말로만 듣던 LA도 밤 열 시가 되니 상가는 문을 닫고 오고 가는 사람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초라한 모습으로 지인이 나타났다. 먼 길 운행으로 제대로 씻지 못하고 기름때가 옷에 듬성듬성 묻어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도 씻지 못해 행색이 말이 아닌데 나보다 더했다. 늦은 밤이라 긴말을 못하고 거듭 트럭을 왜 하려 하느냐, 고생이 심하다, 길에서 차 고장나면 난감하다, 돈 많이 든다. 생각 잘해라. 격려보다는 마음에 짐만 잔뜩 안겨주고는 아직 집에도 못 들어갔으니 가 봐야한다고 하곤 훌쩍 떠나 버렸다. 숙소도 없고 당장 잘 곳도 없는 처지라 난감했다. 어디로 가지? 듣기엔 LA는 강도도 많고, 총을 가지고 있으니 밤늦게 혼자 걸어다니지 말아라, 위험한 도시다… 듣고 온 것이라곤 공포스러운 말만 전해 듣고 왔기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래도 한국 마트가 있는 마트 주차장이 낫겠지 하고 있으려니 SECURITY가 나가라고 한다. 쫓겨난 신세가 되어 무작정 차를 몰았다. 어딘지도 모른다. 밤길을 달리다 보니 도로 옆에 커다란 몰이 있는데 한가하기 이를 때 없어 보였다. 무작정 그 몰로 갔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 차를 세워놓고 문이 잠겼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쪼그려 잠을 청했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달은 보름인가 밝기 그지없었다. 차안에서 뒤척이면 차가 들썩이는 모습이 나쁜 사람 눈에 뛸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화장실도 못 갔다. 긴장되니 별로 생각도 없었다. 그저 무사히 이 밤이 넘어가길 바랄 뿐이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스칼렛 오하라의 명대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라는.
그러나 난 내일을 생각할 여유도 없다. 지금 당장 안전이 우선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받았던 인사 중 하나가 ‘복 받을 거예요’였다. 당연한 거다. 내가 하는 일이 복지(福祉) 업무라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니 도움받은 사람으로선 그 인사가 최상의 인사였으리라. 그런 인사는 특별히 남달라서 받는 인사가 아니라 관례 같은 인사였다. 어찌됐든 그 인사 생각 덕분에 난 무사히 그날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내일의 태양이 이렇게 뜨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난 어제 지인에게 받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트럭 학원을 찾아 나섰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적응하며 살아가기 마련. 도전 속에 결과도 나오는 법. 지난 날은 잊고 새로운 도전을 위하여 잠시 주춤거리던 마음을 접고 사막 위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나서듯, 난 내 길을 간다. 네비게이션 지시대로 한참을 가다 보니 내가 찾던 학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호화롭게 살았나, 기대치가 컸나, 모든 게 미국선 실망감으로 다가왔다. LA 도시도 한국의 소도시 같이 보잘 것 없었고 학원도 초라한 환경에 실망감이 앞섰다. 도대체 미국이 왜 강대국이고 선진국인지 또 다시 의문이 몰려왔다.
한국이 잘 살고 쓸데없이 건물들이 화려하고 큰 건지, 미국이 국가만 부강하고 개인은 못 사는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이것은 검소한 생활에서 오는 것이다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눈에 띄는 미국은 가난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앞으로 미국에 대한 공부를 더 하고, 더 깊은 것을 봐야 미국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트럭 학원이라 마음도 놓이고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위안은 되었다. 마음씨 좋은 학원장님의 조언으로 하숙집을 구하고 학원에 등록을 마쳤다. 드디어 트럭커로 향하는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렇게 미국에서 ‘홀로서기의 출발선’이 그어졌다. 잘 되리라 믿으며 내일을 기다려보며, 오랜만에 씻고, 마음 편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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