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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독일 통일

1870년 7월 19일에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프러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1860년대 이전의 독일은 여러 개의 주가 느슨하게 결합된 하나의 연방체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단일국가로서의 강력한 정책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이런 독일을 통일국가로 만들기 위한 비스마르크의 기본정책은 프로이센의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외교력을 동원해 프로이센의 주도 아래 강력한 경쟁 상대인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상태에서 다른 지역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엠스 전보사건’이었다. 7월 13일 아침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휴양지 바트 엠스에서 수행원들과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가 방문해 빌헬름 1세에게 “스페인 왕위계승에 영구히 관여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베네데티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요구한 내용은 빌헬름 1세가 불쾌하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이런 사실이 베를린에 있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려졌다. 비스마르크는 의도적으로 전보 내용을 자극적인 문투로 바꿔 공개했다. 프로이센 여론은 일개 프랑스 대사가 프로이센 국왕을 모욕했다고 분노했다. 프랑스 여론도 프로이센이 대국 프랑스의 요청을 무례하게 처리했다고 분노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 프랑스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미 국방개혁과 대외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룬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엠스 전보를 자극적으로 공개한 것은 독일 통일을 위한 비스마르크의 한 수였다.

그런데 프랑스는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지도자는 1848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가 3년 뒤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한 후 1852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 3세였다. 그는 국내정치 감각은 뛰어났지만 대외정책에서는 큰 삼촌 나폴레옹 1세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럽 질서와 프랑스 국내정치를 주도하기 위해 자신이 프로이센 국왕보다 우위에 있다고 천명하고 싶었기에 프로이센에 전쟁을 먼저 선포했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프로이센 지배 하의 남부 독일 공국으로 진격해 독립시키려는 계획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했고 주변국의 태도를 잘못 판단해 프로이센이 보낸 신호를 한낱 엄포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했다. 나폴레옹 3세의 선전포고는 비스마르크가 판 함정에 빠진 선택이었다. 선전포고 이후 사태는 나폴레옹 3세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비스마르크의 계획대로 전개됐다.

1970년 9월 2일 프랑스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는 대패해 포로가 됐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임시정부가 들어섰고, 10월경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완벽하게 포위한다. 고립된 시민들의 생활은 추위와 식량부족 등으로 처참했다. 국민 총동원을 위해 내무장관 강베타는 열기구를 타고 필사적으로 파리를 탈출한다. 그러나 사분오열된 프랑스 국민은 무력하기만 하였다. 12월부터 프로이센군은 매일 3000-4000 발의 포탄을 파리에 퍼부었다. 1871년 1월 29일, 4개월 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파리 정부는 결국 독일에 항복했다.

파리가 함락되고 몇달 후인 1871년 5월, 프랑스 임시정부의 행정장관 티에르는 비스마르크와 베르사이유에서 만나 가조약을 맺고 강화했다. 이 조약의 기본내용은 다시 프랑크푸르트 본조약에서 확정되었다. 그리고 30년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 때, 빼앗겼던 알자스와 로렌을 되찾아 독일제국의 영토에 병합했다. 더불어 전쟁을 개시한 프랑스에게 책임을 물어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리고 조약을 감시하기 위해 군대를 파리에 주둔시켰다.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군이 파리 공략을 진행하는 동안 파리 교외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머물렀다. 프랑스는 임시정부를 구성해 전쟁을 계속 수행했지만, 결국 1871년 1월 수도 파리는 함락됐다. 1871년 1월 18일 북독일연방과 남부독일공국들을 합친 독일제국(제2제국)의 탄생과 빌헬름 1세의 독일 황제 즉위식이 프랑스의 유서 깊은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열렸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의 통일이 실현된 것이다.
화가 안톤 폰 베르너의 ‘독일 제국의 선포’는 독일 통일의 주역들을 영웅적으로 그려냈다. 1885년 비스마르크의 70회 생일 기념으로 그린 이 그림에는 독일 통일의 주역들이 모두 등장한다. 화면 왼편 휘장 아래 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이 프러시아 황제 빌헬름 1세이고, 화면 중앙에 흰옷을 입은 사람이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그 옆은 여러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참모총장 몰트케이다. 독일의 제국의회는 독일 통일을 완성시킨 비스마르크에게 대공의 작위와 베를린 명예시민의 칭호를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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