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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내가 꿈꾸는 나의 죽음


영정(影幀)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것이 내 모습인가! 내 모습인데 참 낯설다. 문득 서산대사의 말이 떠오른다.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였는데 / 80년 후에는 내가 저 것이구나.

웰다잉(Well-dying)의 시대다.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인생은 60세까지 철이 들다가 그 이후에는 철을 까먹고 살아간다고 했다. 오래 살수록 더 깊은 인격의 소유자가 되기보다는 철없는 아이로 회귀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뜻이다. 사실 내가 어떻게 죽을 지가 걱정이 된다. 요새는 왜 그렇게 암이 많은지 주위 친지들의 죽음이 거의 암으로 죽거나 죽어간다. 그 과정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내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치료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치료를 거부하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 것인가도 지금부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다.

죽음보다 죽을 때 받을 고통을 생각하면 죽음은 역시 두렵다. 그러나 장수해서 치매가 되는 것은 더 무섭다. 내가 사랑하던 이들로부터 그런 방법으로 정을 떼고 가고 싶지는 않다. 앓지 않고 아프지 않고 너무 오래 살지도 말고 남들이 조금은 아깝다고 애석하게 여길 나이에 죽고 싶은 게 나의 마지막 허영이지만, 나라고 중풍이나 치매에 걸려 몇 년씩 병석에 있다가 죽지 말란 법이 없다는 것을 왜 모르랴. 하지만 마지막 죽음은 품위 있게 맞이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다. 그래서 노화를 받아들이되 정신적으로 젊게 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은 세월을 비켜갈 수 있기 때문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94세 나이로 2004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대통령을 두 번 지냈으며 죽기 전 십 년 동안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를 유발하는 질병 중에 가장 흔한 것이다. 여든넷의 아직 건강한 노인에게 알츠하이머병이 찾아드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보기 드문 방식으로 이 병을 맞아들였다. 알츠하이머병 확진을 받은 사실을 미국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다. 레이건은 담화문에서 병을 공개하는 것이 치매에 대한, 그리고 환자와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길에 나섰고 나라의 앞길에 밝은 아침이 올 것임을 믿는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레이건은 철학적 자아의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의 담화문은 자유의지를 가진 지성적 인간으로서 할 수 있었던 마지막 결단이었다. 지는 해가 만드는 낙조는 일출만큼 눈부시지 않다. 하지만 아름다움으로 치면 낙조가 일출을 능가할 수 있다. 레이건의 마지막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요즈음엔 인간의 수명 연장과 함께 치매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 치매란 정상적인 정신능력, 즉 지능 의지 기억 등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로, 한마디로 철없는 아이 이전의 갓난아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벌거숭이로 태어난 바로 그 상태로 벌거벗고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흔히 노인들이 주고받는 말이 있다. 인생 마감 길에 걸리지 말아야 할 병이 세 가지가 있는데, 뇌졸중 즉, ‘풍’이 하나이고, 암이 둘이고, 치매가 셋이다. 그 중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치매다. 암과 풍은 본인이 자각할 수 있는 질병이다. 자기 자신이 아프고 고통 받는데 그칠 수 있다. 이에 반해 치매는 본인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본인의 입장에서는 가장 행복한(?) 것이 치매일 터인데도 치매가 가장 악질로 꼽히는 것은 그것이 주변 모두를 황폐화할 개연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란다. 치매 걸리면 사랑하는 가족도 못 알아보고, 어린애처럼 생떼를 쓰며, 추악하게 먹을 것에 집착하고, 대소변도 못 가리게 되기도 한다.

세상사 갖은 환난고초와 맞닥뜨려 이겨낸 백발의 권위와 당당함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다. 화목하고 단란했던 가족에 대한 가장 기본적 신뢰와 애정마저 송두리째 빼앗은 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치매는 그래서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라고 한다. 나는 적어도 병원에서 죽음을 맞고 싶지는 않다. 병원에서의 죽음은 진부하고 비인간적이며 참혹하다. 나는 그저 자연이 내게 준만큼의 고통만을 받고 싶지, 의사들의 인위적인 노력을 지켜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

사실 내가 어떻게 죽을지가 좀 걱정이 된다. 죽음이 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다만 바람이 있다면 나뭇잎이 떨어지듯 그렇게 죽음을 맞고 싶다. 비통하고 무거운 모습이 아니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기실 제 할일 다하고 나서 미련 없이 떨어지는 나뭇잎은 얼마나 여유로운가.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 세상에 손 흔들며 작별하지 않는가. 이제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 삶을 부정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며 스스로에게 미소 지을 수 있게, 그리하여 한 해의 삶을 마감할 때 한 해 처음의 시작보다 적어도 1㎝의 눈금만큼이라도 더 나아진 삶을 살았다는 만족감을 가질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죽음보다 죽을 때 받을 고통을 생각하면 죽음은 역시 두렵다. 그러나 장수해서 치매가 되는 것은 더 무섭다. 내가 사랑하던 이들로부터 그런 방법으로 정을 떼고 가고 싶지는 않다. 중풍에 걸려 오래 누워서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가고 싶지는 않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내 엉덩이를 닦아주어야만 된다는 사실이 가장 두렵다. 앓지 않고, 아프지 않고, 너무 오래 살지도 말고, 남들이 조금은 아깝다고 애석하게 여길 나이에 죽고 싶은 게 나의 마지막 허영이지만, 나라고 중풍이나 치매에 걸려 몇 년씩 병석에 있다가 죽지 말란 법이 없다는 것을 왜 모르랴.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된다. ‘산 자의 죽음 이야기’가 공허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그 누가 모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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