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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강산이 네번 바뀌고서야

눈이 소록소록 내리는 늦은 오후. 우리는 리어카에 연탄 100장을 채우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앞에서 핸들을 잡은 동훈이는 한손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뒤에서 미는 기흔이와 나는 미끄러져 내리는 리어카를 밀면서 하얀 입김을 헉헉 내쉬고 있었다. 그 옆에서 만석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푸른 잔디 풀 위로 봄바람은 불고 아지랭이 잔잔히 피는 봄날에...." 아직도 먼 봄날을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모두 행복해져 보라색 커튼을 통해 은은히 비쳐오는 아뜨리에 불빛을 향해 추운 줄도 모르고 고단한 행군을 즐기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뜨겁게 타오르는 연탄난로를 끼고 밖엔 눈이 발목까지 쌓이는 줄도 모르고 이런 저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끝도 없는 이야기는 새벽동이 틀 때까지, 연탄 하나를 꼬챙이에 끼어 바꾸어 넣을 때까지도 계속됐다.

두 벽이 유리로 둘러져 있는 이곳은 집 위쪽 언덕에 따로 지은 온실 같은 장소였다. 창고로 사용되었던 이곳을 사정 사정해 적은 월세로 빌릴 수 있었다.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오픈된 공간이어서 우리는 시장 포목점에서 보라색 천을 사다 적당한 싸이즈로 잘라 커튼을 만들어 유리창을 막았다. 그 후 이곳은 동네의 명소가 됐다. 후미진 대방동 구석, 버스 정거장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 와야 하는 변방에, 눈에 뜨이는 보라색 커튼, 밤이면 은은히 새어나오는 불빛 하며, 때로 예쁜 여학생들이 꽃을 들고 찿아오기도 하는 곳, 늦은 저녁이면 "지고이넬 바이젠" 바이올린 연주곡이 울리질 않나, 죽어 있는 동네 분위기에 좀처럼 어울리지 않은 그런 장소였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어르신들도 계셨고. 동네 어깨들도 가끔 들렀다 친구가 되기도 했고, 아뜨리에인 줄 알고 그림 배우겠다고 찿아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비너스, 아그리파, 쥴리앙, 아폴로, 브르트스, 세네카 등등의 석고 흉상들, 그림그리는 이젤들과 널려있는 물감들, 한쪽 구석엔 정물대와, 나무로 길게 짜맞춘 나무 의자들, 화보집, 책, 턴테이블과 스피커, 레코드판들이 우리에겐 전부였지만. 우리에겐 꿈이 있었고 그 꿈들은 사각형 보라색 커튼 안에서 연보라로 피어나고 있었다.

강산이 네번 바뀌고서야 나는 그들과 춘천 세계 인형극제(이사장•강원대 한기웅교수)에서 꿈처럼 동기들을 다시 만났다. 한기웅 교수, 경원대 서기흔 교수, 사업가 감만석, SK 이사 서봉학, 서호갤러리 홍정주 관장, 공예가 이미령, 디자이너 김윤경, 그리고 여미 갤러리 조선희 관장과의 반가운 재회는 눈물겹다고 말하고 싶었다.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달려온 저들의 얼굴은 빛났고 아름다웠다. 우린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 안았고 40여년의 길고 먼 시간의 간극은 거기엔 없었다. 그날 인형극 관람, 함께한 저녁은 최고의 분위기였다. 일행중 몇은 자작시를 낭송했고 친구들은 박수로 감사를 표했다. 그날 밤 이후 친구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함께 해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흘러간 시간들은 오히려 우리들 속에 기억들을 끄집어내어주었고 내년의 만남을 다짐하며 아쉬운 작별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살아있었으나 죽어 있었다. 아니 죽어 있었으나 살아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가슴에 큰 짐 보따리 하나를 품고 시카고로 돌아왔다. 몇일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보따리를 풀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게 묻고 또 묻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의 ‘서시’가 내내 입가를 떠나지 않는다. 살아야겠다. 하늘이 너무 파래 눈 감지 못할 때까지, 밤하늘 수놓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야겠다.(시카고 문인회장)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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