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내 것이 아닌 것들

폭풍이 휘몰아친 가슴엔 풀 한 포기 남지 않는다.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마을에는 부서진 집과 뿌리 뽑힌 나무둥치가 나뒹굴고 허리케인이 스쳐간 바닷가엔 모래 사장이 하늘을 부둥켜 안는다. 가슴은 무엇을 위하여 심장의 박동을 힘차게 뛰게 하는가. 기쁨이던 환희던 사랑이던 이별이던 아픔이던 가슴이 저리고 뛰는 시간은 살아있는 시간이다. 생의 높고 낮은 언덕과 질곡을 뚫고 가슴으로 몰아친 폭풍은 몸의 마디마디를 저리게 하고 빈 메아리로 온 몸을 맴돈다. 소리를 잃어버린 메아리는 빈 가슴에 구멍 뚫린 바람으로 심장의 곳곳을 스쳐간다. 아프다. 기쁨과 환희도 끝나는 시간은 아프다. 함께 웃고 만지고 사랑하던 애틋한 만남은 길어도 너무 짧다. 딸네 가족이 추수감사절 다음날 새벽 일찍 뉴저지로 떠났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손주들을 어디로 가는지 감을 못 잡고 손을 흔든다. 또다시 이별이다. 얼마나 더 다시 만나고 헤어지는 연습을 해야 하나. 생의 기쁨은 순간이다. 조금 전까지 웃고 비비대던 시간들은 비둘기처럼 허공을 날아간다.

절친한 분이 응급실에 입원해서 병문안을 드렸다. 어머니가 생을 마감 하기 전 일주일 동안 계시던 병원이라 감회가 저리고 아프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생각. 사는 것이 모질지만 죽는 것은 허깨비 바람처럼 급속도로 소멸된다. 응급실과 ICU에 입원한 환자들은 이승과 저승의 중간 지점에 있는 듯하다.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지 말기를 염원하지만 그건 단순한 희망이다. 죽음의 칼날은 아무도 비켜가지는 못한다. 죽음이 생의 일부분이라 생각하면 미련을 가질 것도 절망할 것도 없을 것이다. 품위 있게 죽을 수만 있다면 두려움 없이 이승의 매듭 풀고 홀연히 떠나리라. 젊을 때는 죽음이 까마득히 먼, 절대로 내게 일어날 일 같지 않아서 사는 데만 몰두했다. 이젠 떠나는 시간들을 위해 마음 추스릴 시간이 온 것 같다. 30년 전에 만든 유언장도 업데이트 하고 죽음과 삶을 오락가락 하는 환자들 보며 미루기만 했던 ‘Living Will’도 만들 생각이다. Living Will 은 본인이 직접 결정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위독한 상태가 되었을 때 존엄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뜻을 밝힌 유언장이다.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담은 ‘존엄사법’은 의미 없는 치료를 받지 않고 스스로 자연스러운 죽음을 택할 수 있어 환자나 가족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귀함을 공유하는 길이다.

이 참에 장기기증에도 동참할 생각이다. 장기기증은 사람의 신체 내부 또는 외부 조직 중 일부를 주는 것으로 뇌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기들을 필요한 환자에게 이식해서 생명을 구할 수 있다. 내 몸을 도려내고 칼집을 내는 게 무서워 결정을 못했는데 생명이 끊어지면 두려움도 아픔도 생의 번뇌도 사라질 것이다. 민폐 끼치는 장례식은 생략하고 친족만 참석해 남은 육신은 화장해서 조국이 멀리 보이는 태평양 바다에 뿌려달라고 아들에게 말했다. 뼛가루 흩어진 바닷가에 작은 나무 한 그루 심어주면 초록으로 남아 조국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리라.

내 것이 아닌 것은 모두 두고 떠나리라. 내 것은 없다. 죽은 몸이 타인의 생명을 건지는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가볍게 허공을 나를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신비 속에 잠시 소풍을 왔다. 삶은 달걀과 김밥, 맛난 과자 먹는 즐거운 소풍이 끝나면 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아이들 웃음이 별사탕처럼 쏟아지는 밤이면 은하수 흐르는 강에 얼굴 묻고 내려다 보리라. 작별 뒤에 빛나는 사랑을 노래하리라.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