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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원이 만난 사람] 박규영 전 노스이스턴대 교수

교육을 천직으로 살아온 삶
여성이 건강한 가정-사회 이끈다

교직은 그에게 천직이었다. 지난 6월 일선에서 은퇴한 박규영 전 노스이스턴일리노이대(NEIU) 교수는 부모님은 물론 조부모님까지 모두 교사로 봉직한 교육자 집안 출신이다. 시카고에서 41년간의 교육자 생활은 어쩌면 운명이었던 셈이다.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태어난 박 교수는 대학(경희대 불어교육과) 졸업 후 수산개발공사 비서실에 근무하던 중 1975년 5월 결혼과 함께 시카고로 왔다. 복지회, 총영사관을 거쳐 알바니은행에서 일하던 중 시카고 교육청(CPS)을 찾아갔다. 갖고 있던 불어교사 자격증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NEIU과 첫 인연을 맺고 시험과 평가를 거쳐 1977년 CPS 7~12학년 불어 보조교사가 됐다.

“지금은 다 잊었지만 그때만 해도 불어를 제법 했다”며 웃음 짓던 그는 정교사 임용을 기다리고 있다가 초등학교 교사직 제안을 받았다. 그는 "미국인이나 유럽 출신이 아닌 아시안에게 불어 교사 기회가 오기는 사실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1977년 초등학교 교사와 이중언어 교사 자격증까지 딴 그는 업타운 버드롱 초등학교의 정식 교사가 됐다.

교단에 선 그는 한인 1.5세, 2세들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일을 탐색했고, 1985년 한국 출신 이중언어 교사 10여 명과 함께 하일랜드 파크에 '노스쇼어 한국학교' 문을 열었다. 그는 "시카고에 있던 한국 무용가 은방초 선생에게 한인 학생들을 데려가 부채춤도 가르쳤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데이' 행사 때 한인 어린이들이 선보인 부채춤은 "모든 아이들이 놀라 넘어질 만큼" 인기를 모았다. 이전까지 한복을 "부끄럽다"며 감추던 한인 학생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고, 이후 시 또는 주정부 행사 때 한인 어린이들의 부채춤 공연이 초청 받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많이 배워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이후 석사와 박사 과정을 차례로 마친 후 1996년 시카고 노스파크에 있는 NEIU 교수로 부임했다. 버드롱 초등학교 재직 19년 만의 일이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박 교수의 관심과 열정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NEIU 아시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여름 학기 강좌에 한국어 과목을 개설했다. 여름 6주간 진행한 한국어 강의는 타도시에서 대학에 다니다가 방학이면 시카고 집으로 돌아오는 1.5세, 2세들에게 인기를 모았다.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혼자 준비하고 가르치고 행정 업무까지 맡는 1인 3역 이상이었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

은퇴하면서 시카고 시로부터 받은 표창도 이 같은 노력의 결실이라는 것이 그의 조심스런 설명이다.

41년간의 교육자 생활에서 그가 가장 손꼽는 일은 한국어를 SAT Ⅱ에 포함하는데 일조한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 지원에 나섰던 미주 동포들의 헌신과 노력 못지 않은 일"이라고 강한 자부심을 표현했다.

93년 일본어, 94년 중국어가 차례로 SAT Ⅱ에 포함된 후 미 전역의 한글 학교를 중심으로 한국어 채택 운동이 벌어졌다. 시카고에서도 노스쇼어, 가나안, 일리노이, 새나라 한국학교 학생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1~2달러를 내고 로렌스길 한인 상인들도 십시일반 참여했다. 하지만 2년 간의 모금 운동에도 불구하고 기금은 14만여 달러에 그쳤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말들은 하면서 당장 눈에 띄는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탓인지 한국 정부나 기업의 참여가 없었다. 박 교수는 "다행히 삼성그룹이 채택에 필요한 비용 50만 달러를 내놓아 1997년 한국어가 9번째 외국어로 SAT Ⅱ에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저는 지금도 휴대폰은 갤럭시만, 모든 가전 제품도 삼성 것만 사용하는, 삼성 팬입니다.” 인터뷰 도중 갤럭시 휴대폰을 꺼내 보이는 그를 보면서 한국어 SAT Ⅱ 채택에 얼마나 많은 정열을 쏟았을 지 짐작이 갔다.

그는 TaLK와 같은 원어민 영어 강사 제도의 효과에 대해선 의문을 표시했다. "영어를 잘 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교직 과목을 이수한 예비 교사들이 가르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박 교수는 이중언어 교육과 관련, "예나 지금이나 적지 않은 한인 부모들은 자녀가 빨리 영어에 익숙해지기 위해 한국 친구를 가까이 하지 않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을 위한 'ESL' 과정에서도 빨리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언어를 완전하게 구사하면 다른 언어 학습에 외려 도움이 된다. 어릴 때는 2가지 언어를 동시에 익히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면 영어 어휘가 더 풍부해질 수 있다”면서 “특히 한인 2세들의 경우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게 큰 장점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박 교수는 여성회장을 비롯 한인회, 복지회, 불노초, 한인문화회관, 코윈 등 다양한 한인 단체 활동을 병행해왔다. 한인회 이사로 있던 2003년 미주 한인이민 100주년을 맞아 이민 초기 한인 사회 사진을 모아 디지털 작업을 하고 사진집(Korean American in Chicago) 발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복지회는 시카고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고 각각의 단체 또한 크고 작은 연이 있어서 그렇게 됐다”는 그는 두 딸을 키우는 싱글 맘으로서 힘을 얻고 싶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라고 털어놓았다.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은 그는 한국을 찾았을 때 여성부 청사에 걸려 있는 ‘여성의 힘이 국력입니다’라는 글귀가 너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했다. ‘여성이 약해서 명예를 잃지 않는 한 누구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인디언 부족의 말도 그가 좋아하는 말이다. 어머니와 여성이 행복하면 못할 일이 없고 나아가 가정, 사회, 국가도 건강하고 잘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금도 여성회 이사장으로 ‘좋은 부모 아카데미’와 같은 교육 및 상담, 리더십 프로그램에 관심을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은퇴는 좋은 결정이었다. 자유롭게 여행도 가고 둘째 딸이 낳은 15개월 된 예쁜 손녀도 보러 가고, 얼마 전엔 숙명여고 동창생 5명과 울릉도와 일본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며 은퇴 후의 생활을 들려주던 그는 "스트레스는 없어 좋은데 살이 쪄서 부담스럽다"고 웃었다.

연애 결혼을 했지만 10여 년 만에 결별하고 지금까지 싱글 맘으로 살아온 그는 "부모님과 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또 스스로를 위해 세운 목표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100%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필요했다"면서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믿음을 갖고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이민자 여성으로 미국 교단 생활 41년,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낸 그는 "미국은 머리 좋은 사람보다 꾸준히 밀고 가는 사람이 보답 받는 사회"라고 말한다. 우리 2세들은 이 곳의 패턴에 맞춰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 교육을 천직으로 알고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박 교수의 얘기였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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