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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올 때의 꿈 이루고 베푸는 삶도 실천했습니다”

노재원이 만난 사람 - 박성덕 전 중서부 한인 간호사협회장

오헤어 국제공항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할 때.

오헤어 국제공항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할 때.

2000년 무렵 아시안 보건센터서 자원봉사를 할 때.

2000년 무렵 아시안 보건센터서 자원봉사를 할 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다시 태어나도 간호사의 길을 걷겠습니다.”

지난 2014년 2월, 40여 년 간호사 생활을 마무리 한 박성덕(69) 전 중서부 한인 간호사협회장은 중학생 시절, 간호대학에 다니던 언니의 영향으로 간호사의 꿈을 품었다. 그 즈음 언니가 가져온 ‘영어 세계’란 잡지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을 보면서 “미국 목사와 배우는 한글로 된 잡지에 나오는데 신성일, 엄앵란 같은 유명 한국 배우는 왜 미국 잡지에 실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곤 언젠가 미국에 가보겠다고 다짐했다.

경북대학교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대구 동산병원서 근무하던 1970년대 초반. 당시 미국은 간호사, 의사와 같은 전문직 인력이 절대 부족, 관련 직종 이민 문호를 대폭 열었다.



서울의 소개소를 통해 조지아 주 소재 양로원 취업이 확정된 박 전 회장은 1974년 9월, 단돈 200달러를 손에 쥐고 김포공항서 홀홀단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 그 자리서 바로 미국 영주권을 받았다. 이후 LA를 거쳐 애틀랜타 북서쪽의 소도시 롬(Rome)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24시간이 걸릴 만큼 긴 여정이었다.

백인 노인층이 다수인 인구 3만명 남짓한 롬에서의 초기 생활은 익숙하지 않은 영어와 낯선 문화로 외로움을 더 했다. 집에서 가져온 고추장에 안남미로 지은 밥을 미국식 상추에 싸 먹으면서 울기도 했다. 세탁기 사용법을 잘 몰라 바가지로 물을 퍼 담기도 하고 샤워 커튼을 치지 않았다가 흥건히 젖은 욕실 바닥을 수건으로 닦아낸 적도 있다.
1년에 서 너 번 주고 받는 국제우편과 어머니와의 국제전화가 그 시절의 유일한 낙이자 위안이었다. “초기 미국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어머니’와 ‘믿음’이었다.”

박 전 회장은 첫 직장인 양로원과의 1년 계약이 만료된 후 인근 윈더(Winder), 게인스빌(Gainsville) 등지서 일하다가 1977년 7월, 혼자서 15시간을 운전해 언니가 살고 있던 시카고에 왔다.

퇴근 시간 마주 친 레익 쇼어 드라이브의 자동차 행렬과 바다 같은 미시간 호수,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들을 보면서 ‘역시 사람은 대도시에 살아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절감했다. 아직도 흑인을 ‘컬러 피플’이라고 부르고 인종 차별 관습이 남아 있던 조지아 주와 달리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거리에서 껴 안고 걸어가는 시카고의 풍경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결혼은 평생 대화하며 살아가는 과정

그 무렵 결혼을 위해 두 차례 한국을 다녀왔다. 미국서 온 간호사가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히던 시절이었다. 서울 명동의 부자도 만나고 유학을 준비 중이라는 대구의 갑부 아들도 만나봤지만 인연이 아니었다. 자신을 결혼 상대가 아니라 ‘미국행’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평생 서로 대화하며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기다리면 좋은 사람, 인연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개로 한 남성을 만났는데, 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미국, 꼭 가셔야겠습니까”라고 묻던 그는 ‘미국’보다는 ‘상대’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보여준, 지금 미국 연방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남편이다.

“남편은 2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나를 잘 웃도록 만들어주고 하루의 일과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이들 부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 하루는 남편이 홍시 3개를 사왔다. 남편이 방에 올라간 사이 박 전 회장이 2개를 먼저 먹었다. 남편은 “당신은 남편 생각은 안 하냐”며 남은 홍시에 사인펜으로 이름을 써 놓았다. 이튿날 아침 박 전 회장은 세번째 홍시까지 마저 먹었다. “내 홍시 어디 갔냐”고 묻는 남편에겐 “벌써 당신 마누라 뱃속에 들어갔다”고 응수, 서로 웃음을 지었다고. 이들 부부는 아직 미혼인 맏딸과 결혼해 4살짜리 손자를 안겨둔 아들, 남매를 뒀다.

시카고 노인 아파트서 지내고 있는 아흔을 지난 어머니와 일곱 형제 자매가 모두 시카고 일원에 살고 있다는 박 전 회장은 2013년 초 암 진단 후 무려 8번의 수술을 받을 때마다 가족들의 힘이 가장 컸다며 새삼 감사와 사랑을 전했다.

그는 살아오면서 결혼 8개월 만에 시카고에 도착한 남편을 만났을 때와 1979년 가을 에반스톤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에서 첫딸을 낳았을 때, ‘여성이자 아내에 이어 엄마’가 돼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베풀고 나누는 삶

시카고로 삶의 터전을 옮긴 박 전 회장은 개인 간호사 등을 거쳐 1995년 제시 브라운 보훈병원(Jesse Brown Veterans Administration Medical Center)에서 연방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했다. 암 수술 후 건강은 회복했으나 천직인 간호사 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은퇴 당시 연금 이외에 재직 18년 동안 월급의 5%를 적립한 게 상당한 목돈으로 돌아와 평소 꼭 갖고 싶었던 빨간색 재규어 차량을 구입했다.

그동안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한인회, 중서부 간호사협회, 여성회 등 다양한 단체서 활동한 그는 현재 북미주 경북대학교 간호대학 총동창회장, 평화문제연구소 시카고지부 부회장, 중서부 한인 간호사협회 상임 이사를 맡고 있다.

미국에 오기 전 갖고 있던 두가지 꿈, 여성으로서 정당한 대우와 의사와 간호사의 수평•협력 관계를 모두 이뤘다는 그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엔 매년 한국에 가서 모교 등지서 특강을 하곤 했다. 그 때마다 그가 후배들에게 잊지 않고 들려준 말. “뼈를 우려서 설렁탕을 만들듯이 저는 간호학 3년을 배워 40년을 우려 먹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라는 의미였다. 자신 역시 “No pain No gain, No cross No crown” “A good nurse take care of patient, A great nurse also take care of heart”와 같은 말을 늘 가슴에 새긴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 지 그는 시카고 일리노이대(UIC) 간호대 학장을 지낸 김미자 박사를 가장 존경한다고 한다.

박 전 회장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자원봉사 활동이다. 미국 대통령 자원봉사자 상을 수상할 만큼,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언제 어디든지 찾아갔다. 코로나19 탓에 지금은 중단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오헤어국제공항의 거의 유일한 한인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다. 출발 10분 전 발을 동동 구르던 오하이오 주 한인 여성과 탑승구가 바뀐 사실을 모르고 있던 한국 출장자들이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도록 돕는 등 공항에서 그의 도움을 받은 한인들이 적지 않다.

“사람이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게 다섯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헌혈, 장학금, 자원봉사, 입양, 장기 기증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그 가운데 입양과 장기 기증을 제외한 세가지는 실천했습니다.”

박 전 회장은 미국은 군인을 비롯 선교사, 장애인, 간호사, 연방공무원, 자원봉사자를 존중하는 사회라며 “특히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는 미국을 미국답게 만드는 소중한 행위다. 한인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인 2세들이 연방 공무원과 자원봉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당부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미시간 호수와 빼어난 건축물, 도심 가운데를 흐르는 아름다운 강까지. 40여 년을 훌쩍 넘긴 시카고에서의 삶을 만족한다는 그는 앞으로도 자신이 받고 누린 것 이상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봉사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덧붙였다.

◇1970년대 시카고 한인사회와 로렌동, 놀부동, 용천백이 폭포…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직후 교사였던 부친이 경북 성주중학교로 전근을 한 탓에 성주와 영덕에서 한 글자씩 따 성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말하는 박성덕 전 회장은 사람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았다. 잘 못 사용되는 한국식 영어, 선물과 경조사 등 미국의 각종 사회적 관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자신만의 기록으로 노트에 정리해두고 있었다.

그 가운데 1970년대 말 시카고 한인사회서 통용되던 지역과 주요 용어의 한글식 표현은 이민 초기 낯선 영어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바꿔 부르던 이민 1세대들의 삶과 해학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면 로렌스(Lawrence)는 로렌동, 노스브룩(Northbrook)은 놀부동, 스타브드 락(Starved Rock)에 있는 폭포는 용천백이 폭포, 웰페어(Walfare)는 구두표, 모기지(Mortgage)는 모가지 또는 몰계금 등으로 불렀다고 들려주었다.

쉽게 지나칠 수도 있던 것들을 또박또박 수첩에 적어둔 것을 보면서 그가 갖고 있는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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