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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원이 만난 사람] 시카고와 시카고 사람들 50년 영상 기록 손만성 감독

6세 이후 70여 년 영상 외길
경험과 기록 후배들에게 물려줄 터
내년 1월 ‘우리들의 이야기 50년’ 준비 중

# 1. 해방 전후의 어수선하던 시절. 여섯살짜리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친척 집에 다니러 갔다가 영화관에 갔다. 불이 꺼진 후 화면에 갑자기 큰 기차가 등장했다. 소년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던 관객들의 비명이 또렷하다.

# 2. 1964년 5월 2일. 스물 두 살의 한국인 청년이 시카고에 도착했다. 컬럼비아 칼리지로 영상을 배우러 온, 첫 번째 영화학 전공 한인 유학생인 중앙대 4학년 손만성이다.

# 3. 1968년 여름, 청년 손만성은 디반과 쉐리단 길이 만나는 곳에 있던, 시카고 최초의 태권도장(파독 광부 출신 은상기씨가 관장)을 찾아가 영상을 찍었다. 학교에 제출할 과제물의 하나였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이야기 50년’ 영상의 시작일 줄 그 땐 미처 몰랐다.

1940년 서울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손만성 감독은 운명처럼 영화에 빠져 영상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부친과 함께 살던 그는 6세 때 본 무성영화가 계기가 돼 이후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컴컴한 곳에서 갑자기 기차가 등장했을 때,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는 “너무 오래 전 일이어서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The Train’인가 하는 제목의 프랑스 무성 흑백영화였다”고 회고한다(1940년대 한국에 소개된 적이 있는 1분짜리 ‘The Arrival of a Train’이거나 아벨 강스(Abel Gance) 감독의 ‘철로의 백장미’(La Roue)로 추정된다)

다른 전공과 달리 예술 전공자들은 대학 3학년을 마치면 유학이 가능했던 터라 4학년 시절, 영화로 유명한 시카고 컬럼비아 칼리지 입학 허가를 받았다.

살면서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며 ‘인복 많은 사람’을 자처하는 그는 지인들의 후원으로 미국에 왔지만 대학 등록 후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밤에는 일을 하면서 학비와 생활을 해결했다.

“당시로서는 드문 영화 유학을 온 탓인지, 저를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유학 올 때 25달러인가, 50달러를 들고 왔다”며 웃음 짓던 그는 유학 초기 옆집에 살던 일본인 가족을 잊지 못한다. 가난한 유학생을 위해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녁 식사를 챙겨줬기 때문이다. 또 먹을 게 마땅치 않아 사흘 동안 감자만 먹고 있을 때 슬그머니 20달러를 건네 준 친구와 졸업식 양복을 해준 친구 이명갑씨도 그에게 ‘감사’와 ‘인복’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게 해준 이들이다.

손 감독은 1968년 태권도 도장 촬영 당시(# 3 참고) 부인 헬레나 씨를 만났다. 어바나-샴페인의 일리노이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다가 해부학을 할 수 없어 드폴대로 옮긴 헬레나 씨는 호신술로 태권도를 배우던 중이었다. 손 감독과 헬레나 씨는 이후 2년 간의 교제 끝에 1969년 결혼했다.

이들은 유대인인 헬레나 씨 부모의 반대로 혼인 신고만 하고 살았다. 100일여만에 장인 장모의 허락을 받긴 했지만 식을 올리지 못한 이들 부부는 내년 결혼 50주년 때 식을 올릴 계획이다. 모든 종교를 존중한다는 손 감독은 자신을 포함한 가족 묘지를 미리 준비한 아내를 위해 3차례의 시도 끝에 개종했다. 인종적으로는 한국인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인이 된 것이다. 순두부찌개를 좋아하는 헬레나 씨는 남편 덕분에 한국인들과 다양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한인들이 많이 접한 민병철 생활영어 테이프 제작에 참여한 일이다.

CBS 방송 인턴을 거쳐 영화 제작사에서 26년간 일한 손 감독은 1984년 자신의 이름을 딴 SMS Production을 설립, 운영하다가 2009년 은퇴했다. 지금은 컬럼비아 칼리지에서 영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 동안 극영화, 다큐멘터리, 교육 및 문화 영화, 뮤직 비디오 등을 쉬지 않고 제작해온 그는 왜 영상 작업을 하느냐는 질문에 “카메라만 들면 근심 걱정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영상 자체가 즐겁다”고 말한다.

손 감독의 50년 영상을 관통하는 주제는 ‘평범’이다. 드라마틱한 상황이나 유명인보다 함께 사는 이웃들의 다양하고 소박한 일상을 추구했다. 한국인이라면 왜 미국에 왔는지, 얼마를 갖고 왔는지 등등.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좇았다.

그는 “최소 수백명 이상과 인터뷰를 했고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만 해도 10만명은 되지 않겠느냐”며 언젠가 누군가에겐 소중한 기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 감독은 “1984년 8월 15일 헤롤드 워싱턴 시카고 시장이 한인회 주최 한인의 날 행사에 참석, 축사를 했다. 한인사회로부터 3만달러의 선거 기금을 후원 받아 당선된 워싱턴 시장의 행복하고 친근한 표정이 기억난다”며 정치력 신장과 상대에 대한 진정성이야 말로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 행사에 색동저고리를 입고 나왔던 한인 어린이 30~40명을 찾아 그 때 영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한인사회, 시카고의 역사이자 개인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삶의 기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겐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자신이 찍고 보유 중인 자료들을 총정리, 내년 1월께 한인 커뮤니티 대상 “50년 우리들 이야기’(가칭)를 보여주고 미국 사회를 대상으로 한 1시간 반짜리 극영화도 준비 중이다.

손 감독은 인터뷰 도중 팻 퀸 전 일리노이 주지사와의 특별한 인연도 들려줬다. 퀸 전 주지사가 변호사-주 재무관-부 주지사로 일하던 시절, 같은 빌딩에 있었는데 누구보다 늦게까지 일을 하면서도 직접 물건을 옮기는 등 성실하고 진실한 모습이었다는 것. 이후 퀸 전 주지사의 선거 운동을 자청했고 캠페인 과정을 빠트리지 않고 영상으로 담았다. 이게 인연이 돼 영화에 관심이 많은 퀸 전 주지사의 아들 개인지도를 하고 주지사 취임식에 특별 손님으로 초청 받기도 했다.

1978년 시카고 최초의 한인 TV 방송을 3년간 운영했다는 그는 앞으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후세들에게 빠짐 없이 물려주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어 “비즈니스적인 계산은 해본 적이 없다. 살아오면서 좋은 분들의 도움과 후원을 많이 받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면서 "비전을 갖고 실천하는 게 미디어의 소명이자 힘”이라고 말했다. 손 감독은 오랫동안 현역으로 남고 싶다며 “80세 때 아카데미 수상이 목표”라고 웃음을 지었다.

영상을 선택한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인생의 원칙이 있다면 내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할 수 없는 약속은 아예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시카고를 터전 삼은 평범한 이웃들의 모습을 50년간 영상으로 담아온 손만성 감독을 인터뷰 하는 내내 50년간 시카고와 뉴욕이라는 도시와 그 곳에 사는 이들의 표정을 13만5천여장의 사진에 담은 수수께끼 사진작가 비비안 마이어가 떠올랐다.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을 꾸준히 찍고 촬영한 그들의 궤적은 다른 듯 닮아 있었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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