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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느티나무로, 그래도 살아

깃털까지 털고 가자. 한양 갈 때는 눈썹도 빼고 간다더라. 서부로 이사 갈 짐 보따리 정리하며 아침 저녁으로 새기는 말이다. 중서부에 말뚝 박고 천년만년 둥지 틀 것처럼 얼마나 많이 사 모았는지 필수품과 쓰레기가 구별이 안 된다. 10년 동안 안 쓰다가 버리고 나면 그 다음날 그게 꼭 필요하니 나름 변명은 있다.

화랑 팔려고 건물 보수하며 30년 묵은 재고 정리하고, 집 팔려고 수리 하느라 임시거처로 왔다 갔다 이사짐 싸고 풀고 정말이지 손목이 휘어지고 뼈 마디 부서지게 일 하는 판국이 됐다. 모든 것이 시간을 다투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돼 피할 수도 없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결판이 난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손목이 휘어지게 힘든 농삿일 하시고 밤이면 소리 죽여 끙끙 앓으시던 내 어머니.

산다는 것은 아픈 일이다. 쓰러지지 않고 버티며 살아 남는 것은 기적이다. 청춘은 불에 댄 사랑처럼 쓰라리고 아찔했다. 돌아오지 못하는 작별과 고통, 욕망과 투쟁으로 장년은 천둥번개에 젖어 발버둥쳤다. 철이 들었나! 이제는 조용히 늙고 싶다. 비록 껍질이 말라 비틀어져도 우람한 둥치와 아늑한 그늘로 낯선 발길 멈추게 하고 생의 틈바구니에서 지친 자의 목마른 귀향길 반겨주는 잎새 무성한 느티나무가 되고 싶다.

느티나무의 꽃말은 ‘운명’이다. 느티나무는 운명을 거스르지도 극복하지도 않는다. 천년을 버티며 그냥 그 자리에서 살 수 있는 때까지 살아남는다. 겉은 울퉁불퉁 옹이가 많아 보기 흉해도 둥치를 자르면 아름다운 문향의 속살 품고 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라는 단 한 문장만으로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는 청춘의 열병을 앓게 했다. 순수한 이복 남매의 금단의 사랑을 다루면서도 사랑이 주는 미묘하고 아련한 감성을 수려한 문체로 여물지 않은 청춘의 풋풋한 첫사랑을 담아 1960년 최고의 화제작이 된 소설이다.

사랑은 늘 아프다. 늙지 않는다. 해서 아프고 못해서 더 아프다. 가슴 저린 아픔이 없는 사랑, 뼈저린 고통이 없는 삶은 양지 바른 마을의 입구에서 길 잃은 자의 안내판이 되지 못한다. 느티나무는 멀리서 찿아오는 길손을 반갑게 맞고 못내 발길 돌리지 못하는 소중한 사람을 손수건 흔들며 미련 없이 떠나 보낸다. 마을 어귀 당산나무로 우뚝 서서 정화수 떠놓고 집 떠난 자식의 안녕과 성공을 비는 어미의 한 맺힌 가슴을 쓰다듬는다.

정담으로 모여 더위를 피하고 서당 훈장이 학문을 가르치는 배움의 장소이기도 했다. 느티나무는 마을을 수호하는 신목이다. 혼이 머무는 곳이다. 한자로는 괴목(槐木)이라 적는데 마음 즉 혼(魂) 머무는 가지(木)라는 뜻이 된다.

그 때 그 자리에 하늘까지 닿았던 느티나무는 거기에 있을까. 어렵사리 귀국 할 때마다 슬픈 내 한을 풀어주려고 귀한 자리 마련해 주시던 따뜻한 선배. ‘이런 데서 못 먹어 봤제’ 하시며 꼬부랑 할매가 가마솥 된장밥을 놋그릇에 담아 단 한 명의 손님을 위해 차려주시던 눈물 밥. 느티나무는 아직도 고단한 길손을 맞고 있겠지. 오고 가는 손님 없어도 적막한 느티나무 식당에서 잔 나무 가지로 풍로에 불을 지피던 백발의 할매는 살아 계시는지. (윈드화랑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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